[신향식의 365건강칼럼] 생애기록치유사,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사람

- ‘자서전 대필’ 아니라 삶의 의미 정리하는 마음치유법 - 미국, 유럽선 ‘레거시 라이터’란 직업으로 ‘귀하신 몸’ - 한국은 이제 시작…성공한 은퇴자들 삶 기록으로 남겨 - 억울한 일이나 힘든 사건 극복한 삶도 훌륭한 소재

2026-02-25     신향식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생애기록치유사) = 경영인들의 자서전 집필을 도와 드린 적이 있다. 신세계 대표이사와 현대자동차 중국법인 대표이사, 그리고 전주효사랑요양병원 이사장 부부의 삶을 글로 옮겼다. 이 분들의 시간은 치열했고, 선택은 무거웠으며, 그 기록은 한 시대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자서전이 삶의 궤적을 정리하는 일이라면, 생애기록 치유글은 삶의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의미를 다시 숨 쉬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요즘 나는 지인들의 삶을 ‘생애기록 치유글’ 형식으로 기록해 드리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했는지를 쓰는 일이 아니라, 왜 살아왔는지를 함께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서전이 기억의 바깥을 정리하는 일이라면, 생애기록 치유글은 기억의 안쪽으로 들어가 잊혀진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잊혀진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한국은 이제 새로운 시간의 문 앞에 서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이제는 스스로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는 단순히 노년 인구가 증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정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뜻한다(통계청, 2023).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노년의 마지막 과제를 ‘자아 통합(ego integrity)’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인간이 삶의 끝에서 도달해야 할 심리적 완성의 단계로 설명된다(Erikson, 1959). 삶은 살아갈 때는 흩어진 ‘점’들에 불과하지만, 돌아볼 때 비로소 하나의 ‘선’이 된다. 기록은 그 점들을 이어, 보이지 않던 ‘선’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 ‘선’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전체로서 이해하게 된다.

기록은 마음과 몸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낮추고 면역 기능을 향상시키며, 심리적 안정과 회복을 돕는 것으로 보고되어 왔다(Pennebaker & Chung, 2007). 또, 표현적 글쓰기는 외상 경험 이후의 정신적 회복과 삶의 의미 재구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Niles et al., 2013). 말해지지 못했던 시간은 어둠 속에 남아 있지만, 글로 쓰인 시간은 빛 속으로 걸어 나온다. 그것은 닫혀 있던 방의 창문을 열어, 처음으로 바람이 들어오게 하는 일과도 같다.

감정 기록하면 심리 안정 효과

이미 해외에서는 ‘레거시 라이터(Legacy Writer)’와 ‘라이프 스토리 라이터(Life Story Writer)’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하나의 전문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기록 활동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후대에 의미를 전달하려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노년기의 심리적 안녕과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보고된다(Cornell Legacy Project, 2010). 기록을 통해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내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앞으로 자서전을 쓰는 일을 넘어, 생애기록치유의 길을 더 깊이 걸어가려 한다. 성공한 경영인뿐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성실히 살아온 사람들, 말하지 못한 아픔을 지나온 사람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견뎌온 모든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 삶의 가치는 성취의 크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깊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Frankl, 1959).

삶의 기록은 삶을 다시 사는 일

인터뷰는 언제나 다음 질문,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간 중에서, 당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습니까?”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은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우고, 흩어져 있던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곧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과 심리적 통합을 강화하는 중요한 서사적 과정으로 설명된다(McAdams, 2001).

삶은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발자국은 사라진다. 그러나 기록은 다르다. 기록은 돌에 새겨진 글자처럼,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는 이야기로 완성하는 과정이다(Ricoeur, 1984).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삶을 다시 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은 흔적이 된다.

<참고문헌>

Erikson, E. H. (1959). Identity and the life cycle.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Frankl, V. E. (1959). Man’s search for meaning. Boston: Beacon Press.
McAdams, D. P. (2001). The psychology of life stories. Review of General Psychology, 5(2), 100–122. https://doi.org/10.1037/1089-2680.5.2.100
Niles, A. N., Byrne Haltom, K. E., Lieberman, M. D., & Stanton, A. L. (2013). Writing content predicts benefit from written expressive disclosure: Evidence for repeated exposure and self-affirmation. Cognition and Emotion, 28(1), 41–59. https://doi.org/10.1080/02699931.2013.818987
Pennebaker, J. W., & Chung, C. K. (2007). Expressive writing: Connections to physical and mental health. In H. S. Friedman & R. C. Silver (Eds.), Foundations of health psychology (pp. 263–284).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Ricoeur, P. (1984). Time and narrative (Vol. 1).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ornell University Legacy Project. (2010). The legacy project: Lessons for living from the wisdom of the ages. Cornell University, College of Human Ecology.
통계청. (2023). 고령자 통계 2023. 대전: 통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