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뮤지컬 '몽유도원', 수묵(水墨) 애니메이션으로 펼쳐낸 애련한 러브스토리
- 윤호진 연출이 재창작한 대형 뮤지컬 - 큰 틀 단단히 구축, 디테일 보완하면 세계 진출 밝은 K 뮤지컬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신작 뮤지컬 '몽유도원'을 1월 31일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관람했다.
윤호진 연출은 2002년 최인호 소설에 바탕 한 뮤지컬 '몽유도원도'를 초연했으나 대중적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간 절치부심, 제목부터 대본, 음악, 무대까지 완전히 바꿔 '몽유도원'이란 타이틀로 다시 올린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필자와 연을 이어온 윤호진은 집념의 기획자였다. '명성왕후'와 '영웅'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한국형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연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 부부'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세기의 러브스토리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는데, 이번에 다시 그 집념을 이뤄낸 것이다.
이번 뮤지컬 '몽유도원'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고전 설화를 미디어아트라는 신기술로 극화시키면서 그 베이스를 동양의 수묵화로 했다는 것이다. 배경이 되는 산과 강을 먹의 농담(濃淡)을 활용한 수묵화로 그리고, 그 원화를 디지털 영상으로 편집해 무대에 생동감을 살려냄으로써 환상적인 가상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 결정체를 첫 장면 ‘몽유도원’에서 펼쳐냈다.
조선시대 안견이 그렸다는 ‘몽유도원도’의 몽유도원을 수묵 영상으로 채운 무대미술은 복사꽃 만발한 황홀경을 꿈속에서 노니는 환상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해와 달이 떠오르면서 그 빛과 어둠으로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느끼게 해주었다.
안재승 작가가 각색한 작품의 메인 캐릭터는 아랑과 여경, 도미의 삼각관계다. 여경은 백제의 왕이고, 아랑과 도미는 혼인한 부부다. 꿈속에서 아랑을 본 여경은 끝내 아랑을 찾아내고, 부부 사이를 가르면서까지 아랑과 혼례를 올리지만 태양이 암흑으로 변한 사이 아랑은 도망친다.
첫 장면은 여경이 꿈속 무릉도원에서 아랑을 만나는 판타지의 총체로, 수묵 뮤지컬의 진수를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영상에 여경이 반응하고, 달 밝은 밤 선녀들에 둘러싸인 아랑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불길한 운명을 느끼게 해준다.
음악과 뮤지컬 넘버들은 오상준 작곡가가 양악과 국악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새로 창작했다.
오상준은 현대 뮤지컬의 작법에 판소리와 정가 등 국악의 음률을 더하거나 또는 현대적인 멜로디와 전통 장단을 교차시켰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아리아들은 여경의 집착과 광기, 아랑의 임을 향한 단심, 도미의 애틋함 등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변주시켰다. 재창작 초연이라 귀에 익지 않았는데도 김문정 음악감독이 지휘한 동서양 악기의 섬세한 크로스오버 연주로 극의 아우라를 드라마틱하게 조성해 주었다.
뮤지컬 '몽유도원'은 백제의 설화를 모티브로 한 러브스토리이지만 서양의 고전에 나오는 비극적 캐릭터와 유사한 설정으로 보편적 공감을 안겨주었다. 여경이 아랑을 차지하기 위해 도미의 눈을 찔러 유배를 보내고, 아랑은 여경의 광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대로 얼굴에 상처를 내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연인과 헤어지고 만나는 매개체로 등장하는 조각배, 사랑과 아픔의 아우라를 조성해주는 달의 변화와 검붉은 낙조...
대형 뮤지컬임에도 주요 등장인물은 많지 않고, 스토리라인도 심플한 편이다.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남자 여경은 '영웅'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민우혁이 맡아 한층 더 물오른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집착하는 여인 아랑에 대한 사랑은 광기와 욕망일 수도 있지만 한 여인을 향한 남자의 지고한 순애보일 수도 있다고 필자는 느꼈다.
아랑은 권력자의 야망으로 인해 망가져 버린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우는 개성이 강한 지순한 여인이다. 끝내 남편 도미와 해후하는 장면은 이 순정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다. 이날 연기한 하윤주는 음악극 '정로'와 정가극 '이생규장전'에도 출연했던 중견으로, 격정적인 아리아로 관객들의 감성을 움직였다.
아랑의 남편 도미 역은 얼터네이트 윤제원이 해냈는데 아내를 빼앗기고 눈까지 먼 비극의 캐릭터를 전혀 어색함 없이 연기와 노래로 펼쳐내 신선감을 안겨 주었다. 한 배우가 앙상블에서 주연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윤제원은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내보인 것이다.
문제는 삼각 구도를 이루는 메인캐릭터들이 각각의 개인기는 뛰어나나 아직 초반이라 앙상블이 약했다는 점이다. 사랑을 빼앗고 빼앗기고, 그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 지고지순한 감정의 흐름이 더 절절하고 애틋하게 연출하고 연기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주었다.
특히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 아랑이 눈이 먼 채로 피리를 불던 도미를 만나는 결정적 장면, 이 부부를 찾아온 여경의 극적인 순간에서 더 가슴 저리게 느끼며 눈물도 흘리고 싶었는데 그 부분이 좀 약했다. 러브스토리는 배우 자체에서 매력이 뿜어져 나와야 하고, 체격적인 조건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날 캐스팅은 초반에 조화가 매끄럽지 않았다.
필자만의 감정인지 모르나 더 디테일한 연출과 섬세한 표현이 되어야 세계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날 캐스팅은 여경의 신하 향실에 전재홍, 목지국 백성들의 제사장 비아 역 정은혜, 무신 해씨 가문의 수장 해수 역 김진수, 문신 진씨 가문의 수장 진림 역 유성재였다. 이들은 맡은 캐릭터를 개성 있게 연기했을 뿐 아니라 앙상블과의 호흡도 잘 맞았다.
향실 역 전재홍은 대사와 연기에 절도가 있었고 충신으로서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살려냈다. 대왕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 뮤지컬 넘버의 가사처럼 감정라인을 더 살렸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랑하는 백성들을 이끄는 제사장 역 정지아는 수궁가 완창 음원을 냈을 정도로 판소리에도 능할뿐더러 '장화 홍련' 등 유명 창극에서도 개성을 보여온 베테랑답게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아랑을 보살피는 따뜻한 연기로 주목을 모았다.
윤호진 연출은 사랑 이야기만으로는 밋밋해질 수 있는 무대에 특기인 군무 캐릭터로 재미와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무신의 수장 김진수와 무신의 수장 유성재는 서로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앙상블들과 군무로 흥을 더해주었다. 코미디 프로로도 낯익은 김진수가 이제는 뮤지컬 배우로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음을 보여주는 활력 넘치는 연기를 보였다.
'명성황후' '영웅' 등 인물 중심의 창작 뮤지컬에서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 온 윤호진 연출은 이제 세계 무대를 겨냥한 러브스토리로 외연을 넓혔다. 그는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라며 '몽유도원'은 이야기와 음악, 무대미술과 의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작품임을 강조했다.
필자는 윤호진 연출의 한국형 창작 뮤지컬에 응원을 보내왔고, 같은 맥락에서 '몽유도원'의 성공도 기대한다. 다만 이 뮤지컬이 국내 흥행을 거쳐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감정선과 음악의 대중성, 무대의 요소요소 등 디테일을 세심하게 보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양의 미학으로 내세울 만한 ‘수묵화 뮤지컬’, 이 얼마나 멋진가. 여기에 모두가 공감하는 세기의 러브스토리를 완전체로 완성 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본다.
끝으로 스태프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대, 조명, 영상 디자인을 모듬으로 담당한 이모셔널씨어터는 수묵 영상 디자인을 맡은 탁영환과 함께 수묵 뮤지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본다. 세계 진출을 겨냥한 국제 규격의 세트라고 하는데, 백제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 무대만큼은 너무 거대하고 우리 정서와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았다.
이진희의 의상디자인도 특기할 만하다. 이제까지 보던 고전 의상과 달리 작가의 개성을 살려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궁중의 복식이나 혼례복도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였으며 백성들의 의상과 모자들도 풍속을 재밌게 살려냈다.
솟대와 깃털로 옛 풍속과 정서를 살려낸 조윤형의 소품, 이 같은 의상과 소품으로 서양 뮤지컬과는 다른 군무를 보여준 서병구의 안무 등이 한국형 창작 뮤지컬에 한몫을 했다.
이제 연극도, 뮤지컬도 첨단기술과 결합하는 추세다. 수묵화로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는 자체도 특이하지만, 가슴 울렁이며 선망의 눈길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보았던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팬텀 오브 오페라'의 조각배 로맨스 같은 판타지한 장면을 우리 설화, 우리 정서, 우리 기술로 창작해 냈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