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김이듬 시인의 ‘상주의 지혜’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상주의 지혜 / 김이듬
폭우 내리던 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작은아버지가 화환을 눈여겨 세어보셨다. 나를 돌아보았고 아무 말 없으셨다.
네 아버지가 너 자랑하며 대학 강의 나간다고 하던데, 네 아버지가 네 자랑하며 시인이라고 하던데, 시집도 한두 권 낸 게 아니라던데 무언중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책을 낸 출판사가 적지 않은데, 어디서도 화환이 오지 않았다. 내가 출판사 편집자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일 아침 열 시에 아버지 발인한다. 밤에 장례식장을 나와 반달 보며 서 있었다. 슬픔보다 고단함을 크게 느끼는 내가 한심했다. 작은아버지가 담배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소복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리고
상주가 꽃 배달 업체에 적당한 화환을 주문하고 리본에 쓸 문구를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다음에는 꼭 그러라고 했다. 비바람이 찼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민음사, 2025)
김이듬(1969~ ) 시인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2001년 계간지 ‘포에지’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그의 시는 단순한 감성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경계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실험적 시도로 주목받아 왔습니다. 강렬한 언어 감각 속에서 사회가 쉽게 말하지 않는 어두운 면과 성적 소수자, 여성, 정신적 경계에 선 인물들, 화재와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시집으로는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등을 펴냈으며, 소설 ‘블러드 시스터즈’와 여러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2025년 12월에는 신작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출간했습니다.
김이듬 시인은 김달진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샤롯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작품들은 영어권을 중심으로 꾸준히 번역·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히스테리아’의 영어 번역본 Hysteria는 2020년 전미 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아시아 번역상을 수상하며 한국시의 깊이를 세계에 알리고, 그 위상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경상대학교에서 시 창작과 문학을 가르쳤으며, 2012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머물며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시를 써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는 시 전문 서점 ‘책방이듬’을 운영하기도 했고, 웹진 ‘시산맥’ 주간 활동과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강 등으로 창작과 교육을 함께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이듬 시인의 시는 외롭고 쓸쓸한 독자들의 마음에 말을 걸고, 쉽게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대신 건네며, 오늘도 누군가의 삶에 작은 숨과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