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눈먼 올빼미 · 소류지에 머무는 밤 外
- [비평연대] 서민서·최상현·김성신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편집자주]
■ 눈먼 올빼미(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연금술사 / 2013)
일상의 안온함이 감사가 아닌 무덤처럼 느껴질 때는 어둠이 필요하다. 오래도록 눈을 꽉 감았다 뜨면 세상이 깨끗한 파란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삶을 새것처럼 살고 싶을 땐 깊은 죽음 같은 책을 찾는다.
'눈먼 올빼미'는 자살을 유발하여 금서가 됐던 책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죽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굳이 남의 글로 읽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서 꿈과 환상과 현실은 뒤섞이고, 커다란 원으로 묶여 빙빙 돌고, 결국 하나가 된다. 쉽사리 깨지 않는 악몽 같은 문장과 반복 재생되는 메타포에 짓눌리다 생생하게 숨 쉬는 나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또한 슬픔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서민서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김지승 지음 / 마티 / 2025)
260면 조금 넘는 이 책은 에세이인지 비평인지 경계가 흐릿하다. 하지만 여백(Margin)은 ‘상호 관계적인 읽기’ 가 가능한 공간(11p)이자 지면에 밀려 소외된 이들이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곳이다. 읽고 쓰기는 작가와 독자와 관계하고 내 언어로 풀어내는 순환적 과정. 이 과정이 빼곡하게 모여 비로소 비범한 일들이 일어나는(141p) 곳이 된다.
저자는 가장자리로 밀려나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버지니아 울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찬쉐, 엘렌 식수, 메리 셀리, 차학경 등. 여백을 쓰면서 어떻게 인식이 확장되는가. 단지 여백에 써 내려간 텍스트가 주석처럼 스쳐 지나갈 무언가가 아니라 생각 확장의 자양분이 되듯, 독자들은 여백이 넓은 이 책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읽어 나갈 때 텍스트 문맥 사이로 전해지는 감정들 틈으로 해방감을 선사한다. 말하지 못했고, 알지 못하던 것들이 앎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최상현 / 출판평론가·비평연대)
■ 인간 본성의 역습(하비 화이트하우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
하비 화이트하우스의 '인간 본성의 역습'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도덕적 실패나 제도적 결함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저자가 겨냥하는 진단의 초점은 보다 근본적이다.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지녀온 세 가지 심리적 편향, 즉 순응주의·종교성·부족주의가 문명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오늘날의 위기를 설명하는 핵심 변수라는 점이다. 저자는 선사시대에 형성된 인간의 심리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현대 문명의 규모와 속도 속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긴장을 낳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작동하는 조건과 문명의 구조 사이에 발생한 불일치다.
화이트하우스는 자연선택으로 형성된 심리가 인간 사회의 기초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역사의 방향을 필연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가 맞물려 형성된 ‘부자연스러운 역사’이며, 본성은 규범과 제도 속에서 증폭되거나 굴절되어왔다. 이 관점은 인간 행동을 계몽의 문제로 환원해 온 기존 담론과 분명한 거리를 만든다. 기후 위기나 정치적 양극화는 정보 부족이나 인식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 행동의 편향이 제도적으로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대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제시되는 해법 역시 감정적 낙관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과학적 증거와 합리적 논증만으로는 집단의 행동을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대신 의례, 규범, 집단적 동조와 같은 인간 본성의 작동 방식을 새로운 문화적·제도적 설계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교정하자는 선언이 아니다.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전제로, 문명의 조건을 다시 조정하자는 제안이다.
'인간 본성의 역습'은 인간 본성이 오늘날의 위기를 낳았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사시대에 형성된 심리가 현대 문명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분열과 집단적 태만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을 바꿀 수 있는가’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이 작동하는 방식에 맞춰 문명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에 있다.(김성신 / 출판평론가·비평연대 가디언즈)
■ 소류지에 머무는 밤(박소담 지음 / 이상공작소 / 2025)
"너를 찾는 나의 밤은 유영이었다. 모르게 품던 붉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다녔다. 헤엄 없이도 멀리 흘러가는 발자국. 그러다 언젠가 투명해지고 잊힐까 봐 숨이 막힌다." — '푸른 유영' 중에서
박소담의 ‘소류지에 머무는 밤’은 상실 이후의 삶이 어떤 감각으로 이어지는지를 문장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사범대를 졸업한 뒤 경기도에서 중학교 교사로 지낸 저자는 제자와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후 학교를 떠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실과 애도, 위로와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작업은 삶의 경험과 맞닿아 있으며, 현재는 학교 밖 청소년과 발달장애 청년들의 창작 활동을 돕는 한편 북한 이탈 가정 청소년을 위한 정규학교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다.
이 책에서 기억은 시간의 순서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가족의 부재, 유산과 아이의 죽음에 이르는 슬프고 아픈 경험들은 장면과 이미지의 단위로 호출된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문장 사이의 여백에 남는다. 말하여지지 않은 부분은 이미지와 침묵으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책의 중심 은유인 ‘소류지’는 흐름이 느린 물의 자리다. 유년의 집과 병실의 풍경, 겨울의 저수지와 그림 앞의 침묵이 이 은유의 공간에 포개어진다. 문장들은 빠르게 이동하지 않고 한 장면에 머물며 감각을 축적한다. 그 시간 속에서 기억은 고정되지 않는 형태로 남는다.
‘소류지에 머무는 밤’은 상실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의 시간과 감각을 하나의 호흡으로 엮으며, 독자가 잠시 머물 수 있는 감각의 공간을 마련한다. 슬프지만 강인한 문체가 매우 인상적인 산문이다.(김성신 / 출판평론가·비평연대 가디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