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시각 장애 딛고 무대 선 송승환 배우...칠순 기념 연극 ‘더 드레서’

- 5년 전 ‘선생님’ 역에서 '노먼' 역으로 무대 복귀...디테일 돋보인 열연 - 배우들과 문화계 인사들, ‘해피 버스데이 투 송승환’ 합창

2026-01-11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영국 작가 로널드 하워드의 희곡 ‘더 드레서’가 이렇게 섬세하고 감성적인 작품이었던가.

5년 만에 다시 관람한 ‘더 드레서’는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다.

배우와 조력자의 관계, 그리고 연극과 관객이 무엇인지를 새삼 뜨겁게 느끼게 해준 것이다.

1월 10일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장유정 각색 연출의 ‘더 드레서’를 유명 배우들,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관람했다.

공연 후에 알았지만 송승환 배우의 칠순을 기념하는 축하 무대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11월 23일, 송승환 배우의 초대로 정동극장에서 본 후 5년만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극 중 노배우 ‘선생님’을 했던 송승환 배우가 이번에는 보조자인 ‘노먼’으로 캐릭터를 바꿨고, ‘선생님’을 연기파 정동환 배우가 한 것이다.

연출(장유정)과 스태프(무대 오팔영, 조명 구윤영, 음향 김기영, 의상 조문수 등)도 그대로였고, 사모님 역 정재은, 무대감독 맷지 역 이주원, 젊은 배우 옥슨비 역 임영우 배우도 같았다. 이날 캐스팅에서 제프리 역만 유병훈 배우로 바뀌었다.

이미 보았던 학습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달오름극장의 아우라 때문일까.

첫 관람 때와 달리 작품의 전모가 이해되었고, 배우들의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특히 정동환 배우는 퇴물이 되어버린 노배우지만 권위와 자존심이 대단한 ‘선생님’ 캐릭터에 딱 맞았고, 극 중 ‘리어왕’의 연기 또한 원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노배우가 무대에 오르도록 의상부터 분장, 대사와 괴팍한 습관과 독선적인 감정까지 곁에서 수발하는 송승환 배우의 노먼 캐릭터는 너무도 섬세하고 완벽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명연이었다. ‘선생님’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보조자로서 태도와 움직임 분 아니라 말투와 감정의 디테일까지 명징하게 살려내는 을의 연기를 몸에 밴 듯 해낸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42년, 독일군의 공습이 계속되는 영국의 한 지방극장이다. 전쟁 중인데도 당시 극장들은 공연을 계속해 나갔다.

“공습은 아직 진행 중이고요, 저희는 공연을 시작할 겁니다.”

극 중 노먼의 대사처럼 관객들은 안내방송이나 조명 신호로 공습경보가 나오면 객석에 머무를지, 대피소로 갈지를 스스로 결정했다.

수십 년간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을 이끌어온 노배우 ‘선생님’은 기력이 쇠진해 자신의 227번째 ‘리어왕’ 공연이 임박했는데도 첫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수십 년간 그의 곁을 지켜온 드레서 노먼은 ‘선생님’의 심기를 살피면서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 공습 중에도 공연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이다. 공연을 포기하려던 ‘선생님’도 관객이 만원이라면 다시 힘을 냈다. 관객이 있어야 배우가 존재하는 것인데, 생사의 전시에도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다는 것에서 연극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 숨 쉬고 있음을 보았다.

필자가 이 작품에서 가장 실감 나게 본 장면은 ‘선생님’에 대한 노먼의 대사였다. 특히 ‘선생님’이 분장실 의자에서 숨을 거둔 후 허탈하게 내뱉는 노먼의 독백 장면은 이 작품의 압권이었다. 한 사람을 위해 올인했던 인생이 무너져내린 절규는 처절했다.

노배우는 을인 노먼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등 갑질을 해대면서 그의 도움에 의지해왔다.

노먼은 “수십 년간 보좌를 했음에도 밥 한번 차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표했다.

주연급 배우나 감독들 중에는 지금도 자기가 최고라는 아집으로 독선과 오만을 보이는 현장을 필자는 눈으로 보고 체험도 했다.

그럼에도 드레서 노먼은 ‘선생님’을 극진히 보살폈고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혼신을 다했다. 그렇게 애정을 쏟은 ‘선생님’이 무대에서 숨을 거두자 “난 어디로 가야해요? 난 이제 뭐 해요?”하는 노먼의 독백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작가 로널드 하우드가 ‘더 드레서’를 이처럼 디테일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연극예술아카데미를 졸업 후 도널드 올핏 경의 셰익스피어극단에 들어가 약 5년간 올핏 경의 개인 드레서를 담당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도 연극이 공연되는 상황과 분장실의 현장 묘사는 탁월했다.

2020년 공연 때는 연출이 깔끔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번 달오름극장 공연을 다시 보면서 장유정 연출의 무대 운영과 배우들의 감정선 조화, 앙상블이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출입문을 중심으로 분장실 안의 집중도를 높이면서, 같은 공간을 커튼 하나로 대극장 무대로 전환시킨 무대 메커니즘이 돋보였다.

스태프들의 역량도 2020년의 기본 틀을 바탕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분장실을 중심으로 동선을 연결시킨 오필영의 무대디자인이 안정감을 주었고, 공습과 폭격 소리를 실감 나게 재현한 김기영의 음향, 리어왕의 망토가 멋진 조문수의 의상, 인물의 표정을 살려낸 구윤영의 조명 등 스태프들의 노력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필자가 이 작품을 새롭게 본 것은 장유정 연출의 세련미를 더한 업그레이드 버전에 더해 정동환 송승환 배우의 연기력과 케미가 멋진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기 인생 55년을 기념한 ‘단테 신곡’에서 원숙의 경지를 보여준 정동환 배우는 70대 이후 난이도가 높은 작품에서 진가를 발휘해 온 명실상부한 연기파 배우로, 연배나 캐릭터로 볼 때 ‘더 드레서’의 ‘선생님’으로 적역이었다.

5년 전 ‘선생님’ 역을 했던 송승환 배우가 이번에 노먼 역을 한 것은 작품을 일신시킨 한 수가 되었다. 몸가짐부터 말투까지 세세하게 디테일을 살린 송승환의 캐릭터 연기가 몸에 맞는 옷처럼 편했고 작품에도 어울렸다고 본다.

송승환 배우는 칠순을 기념해 이날 연기자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초대해 특별공연을 가졌다. 공연 후 생일 축가를 합창하는 축하 행사도 가졌는데, 무엇보다 열연한 무대의 잔상이 남아 더욱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5년 전 그는 급격히 악화 된 시력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무대에 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고 그의 무대 복귀를 뜨겁게 응원했다.

최근 송승환은 시각 장애 판정을 받았다. 가시거리가 불과 몇십 센티 정도인데도 그는 정확한 동선 계산과 피나는 연습으로 정상인처럼 신속하게 무대를 누볐다.

배우는 역시 무대에서 혼신을 다할 때 가장 멋지고 숭고해 보인다.

이날 송승환 배우는 모든 이들, 특히 관객의 성원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빚을 갚는 심정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