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박소란 시인의 ‘사랑받는 기분’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랑 받는 기분 / 박소란
운이 좋네, 말하게 되는 날
교문 앞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 주웠고
정류장에 서자마자 버스는 딱 맞게 도착했고
힘내,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를 받았고
꼭 사랑받는 기분인걸 오늘은
천변을 걷는다
저녁 개천에는 크고 작은 오리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이른 잠을 부르는데
몇은 죽고 몇은 살아
어리둥절 낯선 계절을 맞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봄이 되면 먼 곳으로 놀러 가고 싶다
좋아하는 그 애와
그래도 될까 주저하다 말겠지만
운이 좋다면, 운이 좋다면
병상에 누워 퀭한 눈으로 티브이를 보는 아빠같이
웃고 울고
다시 웃는다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노래 부르고 싶고
얼어붙은 길을 천천히 걷는다
넘어지지 않는다 기적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새끼 오리 하나 불쑥 태어날 것 같고 기어코 태어나
전화를 걸면
전화를 걸면
받지 않는 아빠
전화가 왔다
오래전 멀어진 친구에게서
꿈에 내가 나왔다고 갓난쟁이처럼 엉엉 우는 나를 봤다고
좀 슬프더라
그렇지만 꿈은 반대라니까, 친구는 말했다
꼭 사랑받는 기분인걸
어두운 물속 외따로 허우적대는 날개를 못 본 척
멀리 더 멀리 걷는다
- '도넛을 나누는 기분' (창비교육, 2025)
박소란 시인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생활하였으며, 2009년 ‘문학수첩’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입니다. 등단 당시부터 단단한 시적 역량을 갖춘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 시인으로 일상의 사소한 순간과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섬세한 언어로 포착해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 왔습니다.
그의 시는 사랑과 상실, 슬픔과 불안, 고독 등 인간 보편의 정서를 담담하면서도 정교하게 직조하는 데 특징이 있으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풍경을 투명한 문장으로 드러냅니다.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을 시작으로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수옥’을 펴내며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또한 산문집 ‘빌딩과 시’와 동인시집 ‘도넛을 나누는 기분’ 등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영역을 꾸준히 넓혀 왔습니다.
박소란 시인은 전태일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노작문학상, 동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교보문고 광화문 겨울 글판에 ‘당신이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가 선정되는 등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현재는 프리랜서 에디터로 활동 중이며, 2026년 신춘문예 예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문학 강연과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며 세계일보에 ‘박소란의 시 읽는 마음’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에서 그는 한 편의 시를 매개로 삶의 감정과 기억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시를 읽는 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사유를 건네는지 차분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