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51)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분들을 생각한다

2026-01-05     홍찬선 칼럼니스트
현충원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새해다. 새해를 맞아 오고 가는 덕담(德談)에 마음이 훈훈하다. 2026년 새해는 붉은 말띠인 병오년(丙午年)이다.

붉은 말은 하루에 1000리를 달려도 끄떡없다는 적토마(赤兎馬)다. 새해는 해마다 오지만 병오년의 기대가 다른 이유다. 적토마처럼 힘차게 달려 우리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얽히고설킨 난제들이 술술 풀리기를 비는 마음이다.

그런 기원을 담아 새해 셋째 날에 국립서울현충원에 갔다.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은 분들에게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저 많은 영령들

국립서울현충원 정문을 지나 현충문(顯忠門) 안으로 들어서면 하늘로 우뚝 솟은 현충탑을 마주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散花)하신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희생정신을 추앙하면서 동서남북을 수호한다는 뜻으로, 十형 31m 높이로 세운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탑이다.

탑안의 위패봉안관에는 6.25전쟁 때 시신을 찾지 못한 전사자 10만2000여 용사(위패 현황은 1993년 12월 기준)의 이름을 오석(烏石)에 새겨 위패로 모셨다. 시신은 찾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5700여명의 유해는 중앙지하의 유골함에 안치하고, 그 위에 대형 대리석 승천상을 세워 봉안의 뜻을 받들었다.

현충탑을 돌아나와 현충문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육탄십용사현충비’가 나온다. 이 현충비는 1949년 5월3일, 북한군이 개성 송악산 지역의 아군 고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육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0명의 용사가 고지를 되찾기 위해, 이튿날 폭탄을 몸에 안고 적진으로 돌진해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추모하는 추모비다. 서부덕 중위를 비롯한 10용사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6번 묘역의 제일 앞줄에 있다.

현충원

현충탑 부근에는 ‘제31회 호국문예백일장’에서 특별상을 받은, 고은결 안양예고3학년의 시 '묘목'을 볼 수 있다. 호국문예백일장은 1993년 10월30일에 개최된 1회 이후 매년 5월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실시된다. 초, 중, 고학생과 일반인이 참가할 수 있다.

나의 뿌리는 할아버지
내가 틔울 꽃봉오리가 늘어간다

유월이면 찾아오던 현충원
할아버지 손 잡고 묘역 옆을 걸으며 듣던
지나온 봄의 이야기

모두가 태극기를 품고 눈을 감아서
국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펄럭이는 거라고
독립부터 수호까지
어려운 마음을 배웠다

속으로 찰랑이는 감회
어떤 묵념은 눈물보다 무겁다

언젠가 나이테가 끝까지 그려졌을 때
할아버지도 이곳의 속편이 될 것이다

나는 나무가 되어
할아버지 이름 곁에 서고 싶다

내 목에 걸어주시던 참전용사 훈장처럼
낡아도 닳지 않는 기억을 쥐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가 피워 낼 무궁화
곧게 자라날 것이다
그리움을 딛고

바람이 만개하듯 불어온다
아직도 봄이다
현충원의 꽃들로

- 고은결, '묘목' 전문.

현충원

고은결의 시 '묘목'을 가슴에 새기며 수많은 묘비 사이로 걷는다. 정문에서 바라볼 때 가장 높은 곳에 높게 솟은 하얀 탑을 향해 간다. 바로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이다. 이 탑은 일제에게 불법적으로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신, 대한독립군 무명용사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탑이다. 

위령탑은 12, 14, 16m의 3개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기둥은 가운데를 행해 끝이 구부러져 있는데, 독립군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높이 12m는 1년 열두 달을 상징하고 14, 16m는 높이의 변화를 주어 세월의 변화를 표현했단다. 탑의 후면에는 독립운동을 펼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탑 앞에는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의 영혼을 지켜주는 남녀수호상이 지키고 있다.

주역의 16번째는 뇌지예(雷地豫, ䷏) 괘로 우레가 땅 위로 솟아나와 울려퍼지며 만물이 기뻐하는 모습에서 즐거움과 평안, 공동체의 조화 등을 나타낸다. 14번째는 화천대유(火天大有, ䷍) 괘로 하늘에 태양이 밝게 떠서 만물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그 에너지를 받은 동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 함께 잘 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위령탑을 세운 이경순 작가가 이런 주역의 뜻을 고려했는지 모르나, 무의식중에 이런 뜻이 담겼다는 점에서 신비스럽다.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았다
하늘에서 받은 수명을 다 살지 못했어도 그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다
자유와 독립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었으므로
우리 후손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누리는 나라 물려주어야 했기에

물 설고 땅 설은 땅 만주에서
아니 고구려 엉아들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던 우리의 땅 만주에서
들꽃처럼 웃으며 목숨을 바쳤다
먼저 간 선배들의 그 길에서 노래했다

그리던 조상 나라 다시 살리라
그리던 자유 꽃이 다시 피리라
*
그 노래를 따라 얼들이 돌아왔다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에서

칼보다 날카로운 삭풍을 견디며 외치고 있었다
하루 한달 한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두 함께 잘 사는 태평성대 이루라고
차라리 이 목은 잘릴지라도 무릎 꿇어 종이 될 수 없다고
**

* '독립군가' 맨 마지막 2행을,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이 만주로 망명할 때 압록강을 건너며 쓴 항일시에서 인용.

- 홍찬선,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에서' 전문.

국가유공자 묘역에서 이회영 조만식 선생을 뵙다

현충원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에서 조금 내려오면 국가유공자묘역이다. 이곳에는 일제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이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먼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의 묘소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 주필을 지냈다. 국권을 강탈당한 이듬해인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 순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에 나섰다. 한국의 독립투쟁 역사 3부작을 쓸 예정으로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출간한 뒤 '한국광복사'를 쓰고 싶었지만,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을 뵈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그는 경북 안동의 명문가의 3남3녀 중 장남이었다. 99칸짜리 넓은 집, 임청각(臨淸閣)과 수많은 논밭을 팔고 1911년 만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는 백두대간에서 목재와 지하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중앙선을 만들면서 임청각을 두 동강으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석주 선생이 압록강을 건너며 지은 한시 '도강(渡江)'은 만주에서 항일투쟁에 나설 강한 각오를 짙게 느낄 수 있다.

삭풍(朔風)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이미 내 전택(田宅)을 빼앗고

또 다시 나의 처자를 넘겨다 보니

차라리 이 머리는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종이 될까보냐

- 이상룡, '도강(압록강을 건너며)' 전문.

한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표격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후손인 그는 서울과 경기도 등에 있던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가 함께 만주로 망명해 서전서숙(瑞甸書塾)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우당 선생은 항일독립투쟁과 관련된 자료를 거의 남기지 못했으나, 부인인 이은숙(1889~1979) 여사께서 1966년에 '서간도 시종기'를 발간해 역사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국가유공자묘역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국가유공자제2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청산리대첩에 참여하고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과 임시정부 군무차장 겸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뒤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 그리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벌여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조만식(曺晩植, 1882~?) 선생,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작곡가 등의 묘가 있다.

채명신 장군과 무명학도병, 그리고 창빈 안씨…

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을 참배하고 내려와 파월장병의 묘역으로 간다. 이곳엔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蔡命新, 1926~2013) 장군의 묘가 있다.

채 장군은 월남파병을 반대했지만, 주월한국군사령관을 맡아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였다. 귀국 후 제2군사령관으로 부임했지만, 유신헌법을 끝까지 반대해 강제 예편당했다.

당시 그는 박 대통령에게 “각하,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라고 직언했다고 전해진다.

“나를 국립묘지 장군묘역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 사병 묘역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2번 사병묘역 입구에 유택이 마련됐다.

새해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가자
내 것을 버리지 못하고 남의 것마저 가지려다
망신살 뒤집어쓴 사람들이여

새해엔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서
모든 것 내려놓아 더 많은 것 얻은
채명신 장군을 만나보자 

장군 묘역의 넓은 땅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버리고 생사를 달리한 
빚을, 미안함을 늦게라도 갚으려
사병 묘역에 유택을 마련한 그 마음

새해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서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 술 한잔 올리고
무후선열제단에서 고개 숙인 뒤
애국지사묘역 돌아 
그분들의 그 큰마음 배우자 

- 홍찬선, '채명신 장군' 전문.

이제 현충문을 가로질러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향한다. 정문에서 보면 현충탑 왼쪽에 있는 이 무명용사탑은 6.25전쟁 때 교복을 입고 군번도 없는 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1950년 8월11일, 경북 포항지구전투 때 전사한 학도의용군 48위의 유해를 196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신 곳이다. 탑의 높이는 3.6m이며, 3개의 아치문 중 중앙의 높이는 5.5m, 좌우는 3m다. 

국립서울현충원의 현충탑 왼쪽에
하얀 꽃탑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포항여중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학도의용군 마흔여덟 분의 얼꽃입니다
 
1950년 8월11일 깜깜한 새벽부터
삼복염천이 내리꽂는 낮 1시 반까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맨몸으로 
네 차례나 물리친 용감한 넋꽃입니다

죽음 자체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군복도 군번도 없이 교복 입은 채
검은 강을 건너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함께 가는 학우들이 어깨동무한 덕분입니다

그래도 슬프고 아픈 것은 남았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게 슬펐고
상추쌈을 먹지 못하는 게 아팠습니다

그날이 오면, 해마다 그날이 오면 
포항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현충원의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서
한강변의 학도의용병현충비에서
그날을 잊은 철부지들이 아파합니다

- 홍찬선,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전문.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은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96-1에서, 학도의용병현충비는 한강변 심훈시공원 부근인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172-12)에서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죽지 않을 것처럼 발버둥 치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추하게 죽는 것보다, 죽어야 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고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라사랑이고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새해 첫날도 묵은해 마지막 날과 다를 것은 없지만, 새해에 현충원의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을 찾아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