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복종’을 선택하는 사회의 ‘비극’...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루실 로텔상을 수상한 미국 극작가 라지브 조셉의 2015년 초연작

2025-12-31     주하영 칼럼니스트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연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24년, 벨기에 겐트대학 실험심리학과 교수인 에밀리 A. 캐스파는 ‘복종하는 뇌’와 ‘저항하는 뇌’에 관한 인지신경과학적 연구 발표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콩고, 아르메니아, 르완다, 킬링필드 등 집단학살이 발생했던 곳을 방문해 가해자들과 인터뷰를 실행하고, 8년에 걸쳐 벨기에에서 온갖 실험 환경을 조절해 얻은 “친사회적 불복종률”은 3.66퍼센트에 불과했다.

1961년, 다른 사람에게 실제 고통을 안겨줄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명령에, 상대방의 “비명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복종한 참여자의 확률이 65퍼센트임을 발표해, 충격을 낳은 사회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의 연장선이기도 한 캐스파의 인지신경과학 실험은 “왜”라는 질문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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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왜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명령에 대한 인간의 두 반응인 복종과 저항”이 뇌에서 일어나는 “책임감, 죄책감, 공감, 수치심” 등의 감정과 어떤 연관을 맺으며 영향을 미치는가와 관련해 탐구되었다.

명령에 복종하기로 동의한 뇌에 발생하는 신경학적 수준의 메커니즘을 파악해 “파괴적인 복종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캐스파는,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한 “의인들(Righteous)”에게 바친다고 표명했다.

모든 인간을 하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공통된 인간성(shared humanity)”과 타인을 돕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그들이 “맹목적인 복종이 아닌 다른 길도 있다”는 희망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캐스파는 의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에 새겨진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우주를 구하는 것과 같다”라는 문구를 언급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은 윤리적이고 용감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7)-타지마할의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는, 2017년 국내 초연 당시 충격을 안겨주었던 미국 극작가 라지브 조셉(Rajiv Joseph)의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Guards at the Taj)'의 8년 만의 재공연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17세기 무굴 제국 인도에서 5대 황제인 ‘샤 자한’이 죽은 아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건축한 ‘타지마할’의 공개식 전날 밤, 보초를 서는 두 명의 근위병을 주인공으로 한 이 연극은 2015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루실 로텔상과 오비상, LA 오베이션상을 수상했다.

2010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연극 '바그다드 동물원의 벵골호랑이'(원제: Bengal Tiger at the Baghdad Zoo)로 “잔혹함 속 유머”를 통해 부조리함과 탐욕, 무질서,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조셉은, 10대 시절 숙모에게 들은 ‘타지마할의 전설’을 기반으로 연극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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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 “사랑과 헌신의 상징”이자 “찬란한 무덤”으로 건축된 타지마할은 2만 명의 장인과 기술자들의 노력 속에 20여 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 샤 자한은 완벽한 대칭, 하얀 대리석과 빛의 조화를 자랑하는 ‘궁극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수 없도록, 공사에 참여한 모든 인부의 손을 자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조셉은 전설을 처음 접했을 때, “왜 세계인이 그토록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정적 비용의 대가를 치른 타지마할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높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허구’로 보는 전설이지만, 인류 문명 속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뒤에는 늘 숨겨진 희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조셉은 타지마할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아름다움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점과 연관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와 설계 건축가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작을 쓰던 조셉은 2012년, 오직 ‘휴마윤(Humayun)’과 ‘바불(Babur)’이라는 말단 근위병만 등장하는 2인극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권력과 예술의 관계를 조명하려던 대작이 관객의 관심을 끌기에는 지나치게 교훈적이라는 점을 깨달은 조셉은, ‘가장 작고 하찮은’ 인물이었던 보초를 서는 근위병을 중심으로 대조적인 관점을 부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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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에 착공한 타지마할이 주 묘실과 정원을 완공한 1648년의 밤, 어둠 속에서 괴상하게 울부짖는 새소리를 들으며 보초를 서는 두 근위병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첫 태양이 비치는 순간,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두 사람이 타지마할을 엿본 일은 발각되지 않았지만, 두 근위병은 다음 날 타지마할 건설에 참여한 인부 2만 명의 손을 칼로 베고 인두로 지지는 끔찍한 임무를 수행한다.

피로 웅덩이를 이룬 지하에서, 4만 개의 손목을 자른 바불은 칼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휴마윤은 잘린 부위를 인두로 지지면서 자욱해진 연기로 눈이 먼 것 같다고 소리친다.

세상의 유일한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4만 개의 손목을 자르라는 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휴마윤과 바불의 대화는, 군주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법이 지배하던 17세기를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의 뇌리에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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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복종을 질문 없이 받아들이고 최고 근위 대장인 아버지의 “약해빠진 놈”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 힘 있는 자들의 곁에 있고자 하는 ‘휴마윤’과, 체제와 신, 아름다움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며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바불’은 무척 대조적이다.

“충성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휴마윤은 4만 개의 손을 자른 일을 차라리 영웅담처럼 떠들자면서, 도피와 회피, 잘못된 정당화로 죄책감을 외면하고, “오직 명령에 따랐을 뿐”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에 빠져들며, 아름다움이 더 이상 건축될 수 없도록 세상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죽여버린 행동이 불러온 엄청난 결과를 인지하는 바불은, 명령을 내린 황제를 죽여 대가를 치르게 하자고 주장한다.

바불은 아름다움을 더 이상 죽이지 못하도록 황제를 죽이겠다는 말을 미친 듯 되풀이하기 시작하고,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가 반역죄로 코끼리에 밟혀 죽는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하려던 휴마윤은 바불을 ‘신성모독 죄’로 고발한다.

하지만 휴마윤의 속임수는 통하지 않고, 끝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휴마윤은 바불의 두 손을 휴마윤이 직접 자른다면, 바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명령에 따라, 친구의 손을 베고 홀로 근위대에 남는다.

10년 뒤, 여전히 보초를 서고 있는 휴마윤은 그제야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이 버린 것이 무엇인지, 손을 자르는 대신 함께 도망치자는 친구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라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자신의 안위를 택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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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나무 위에 망루를 지어 친구 바불과 함께 3일을 지냈을 때, 새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머리 위를 지났던 때의 기억은 홀로 타지마할 성벽을 지키는 휴마윤에게 ‘환상’처럼 재현된다.

휴마윤은 허공을 휘저으며 ‘바불’의 이름을 외치지만, 어두운 밤 차가운 침묵 속에 놓인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휴마윤이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존재인 ‘새’와 형제와 다름없던 ‘친구’가 함께했던 순간이 영원히 사라진 지금, 그에게 남겨진 것은 형체 없이 부서져 버린 기억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아보려는 ‘안타까움’과, 죽는 날까지 그와 함께 할 ‘죄책감’, 끝없이 되풀이되는 ‘복종’의 연속뿐이다.

캐스파에 따르면, 규칙을 지키고 명령에 따르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이 “많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한 축복”에 해당한다.

하지만 “잔혹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요인이 될 뿐 아니라 죄책감과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저주”라고 할 수 있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결과를 감수하는 ‘저항’의 선택을 지키는 ‘용기’, 우리의 희망은 그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려갈 수 있는 ‘예술을 통한 각성과 사유’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26년 1월 4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