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바이오영재학교, 의대 일변도 교실에 새 좌표 찍다

- 충청북도, 카이스트서 오송 바이오 클러스터와 연계 - 고교 단계부터 AI·바이오 융합한 질병예방 중심 교육 - 의대 쏠림 완화하고 청소년 진로 선택지 넓히는 시도 - 미국 의사국가시험 만점 AI 등장…의료인재 기준 변화

2025-12-30     신향식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 = 충북 청주 오송에 카이스트(KAIST) 부설 인공지능(AI)·바이오(BIO) 영재학교가 2027년 개교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아직은 설계도와 행정 절차가 중심인 ‘준비 중인 학교’이지만, 이 소식이 교육계 안팎에서 조용히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학교는 단순히 영재학교 하나를 더 만드는 계획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착돼 온 의대 일변도의 청소년 진로 설계에 다른 선택지를 제도적으로 제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실에서 진로 이야기는 대개 비슷한 문장으로 끝난다. 성적이 조금만 잘 나오면 “의대도 가능하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과학을 좋아하든, 생명을 탐구하든, 인공지능에 흥미를 느끼든 목적지는 하나로 수렴된다. 이 말은 격려처럼 들리지만, 많은 경우 가능성을 넓히기보다 다른 길을 닫아버리는 문장이 된다.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교실에서 실제 목적지는 하나로 고정돼 있는 셈이다.

이런 진로 지형이 과연 지금의 의료와 과학, 기술의 흐름과 맞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미 해외에서 먼저 제기됐다. 지난 8월, 미국 의료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의료 인공지능 스타트업 오픈에비던스(OpenEvidence)가 개발한 AI가 미국 의사국가시험(USMLE)에서 사상 처음으로 100% 완전 만점을 기록한 것이다(2025년 8월, Fierce Healthcare 등 외신 보도).

이 소식은 단순한 기술 뉴스로 소비되기에는 의미가 컸다. 의사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시험을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풀어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그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이다. 오픈에비던스를 설계하고 성장시킨 핵심 인재들은 전통적인 의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고등학교와 학부 단계부터 인공지능, 데이터 과학, 생명과학을 넘나드는 융합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전통적 의대 엘리트 코스 대신...

오픈에비던스의 AI는 단순히 정답을 맞히는 기계가 아니었다. 왜 그 답이 옳은지, 어떤 논문과 근거에 기반하는지, 서로 다른 연구 결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암기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지가 아니라, 지식을 어떻게 다루고 재구성할 수 있는지가 핵심 역량이 된 순간이었다. 이는 손으로 별자리를 외우며 항해하던 시대에서 위성항법으로 항로를 읽는 시대로 넘어가는 장면과도 닮아 있다.

이 사례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한국 교육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런 인재는 언제, 어디서 길러지는가. 의대에 입학한 이후의 교육만으로 만들어지는가, 아니면 그 이전 단계에서 이미 갈라진 길인가. 오픈에비던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출발점은 의대 입학 이후가 아니라 청소년기 교육 단계에 있었다. 이들은 먼저 사고의 언어를 배웠고, 문제를 정의하는 법을 익혔으며, 정답보다 구조를 보도록 훈련받았다.

이 지점에서 오송AI바이오영재학교의 개교 추진 소식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 학교는 의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대를 포기한 학생들의 대안도 아니다. 이 학교가 지향하는 것은 오픈에비던스가 보여준 바로 그 인재상, 즉 치료 이후를 담당하는 손이 아니라 치료 이전의 흐름을 읽는 두뇌를 기르는 교육이다.

인공지능으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유전체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의 패턴을 읽으며, 실험실과 슈퍼컴퓨터를 오가는 사고력. 이는 진료실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의료와 바이오 산업 전체를 설계하는 교육이다. 파도를 맞으며 노를 젓는 법보다, 파도의 방향을 읽고 항로를 그리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의사 되지 않아도 의료의 미래 설계 가능”

오송이라는 입지도 우연이 아니다. 오송은 이미 국가 바이오 연구기관과 의료·제약 인프라가 집적된 곳이다. 다만 그동안 이곳에는 연구와 산업을 잇는 교육의 축이 부족했다. 연구는 지역에 남고, 인재는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구조가 반복돼 왔다. 오송AI바이오영재학교는 이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다. 지역을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공간으로 전환하겠다는 선택이다.

오픈에비던스의 USMLE 만점은 우연이 아니다. 의료와 과학, 기술의 세계는 이미 시험 점수 중심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문제는 교육이 그 변화를 얼마나 빠르게 따라갈 수 있느냐다. 오송 AI바이오영재학교의 개교 추진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한국에서도 의대 일변도의 청소년 진로 설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제도 안에서 시험해보는 첫 실험이 될 수 있다.

이혜정 소장 "새 인재 무대 만드는 시도" 

국제 바칼로레아(IB 교육과정)의 국내 공교육 도입을 이끄는 교육과혁신연구소의 이혜정 소장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미 의료 역량의 기준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활용해 인간 이상의 문제 해결 능력과 창출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AI바이오영재학교는 한정된 의대 정원을 둘러싼 경쟁 구조를 넘어, 새로운 의료·바이오 인재의 무대를 만들어 교육의 파이 자체를 키우려는 시도다.”

지식 암기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교육이야말로 미래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게 이 소장의 진단이다.

이 학교가 단순히 새로운 간판의 학교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오픈에비던스가 보여준 미래의 인재상이 한국의 공교육 안에서도 자랄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의대 말고도 의료를 바꾸는 길이 있고, 의사가 되지 않아도 의료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세대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오픈에비던스가 먼저 떠오른 별이라면, 오송AI바이오영재학교는 그 별을 향해 항해를 준비하는 배다. 별 하나로 바다가 바뀌지는 않지만, 별이 없으면 배는 출항하지 못한다. 오송에서 준비되고 있는 이 학교는 한국 교육의 지도 위에 새로운 항로를 조용히 그려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