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49) 황경숙 작가, 서양적 물성과 동양적 정신성으로 세상의 ‘새 무늬’ 만들다

2025-12-24     홍찬선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수없이 많은 거장(巨匠)이 뚜렷한 족적(足跡)을 남긴 뒤에서, 뭇 사람의 눈길을 끄는 작품을 창조하는 일은 힘들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서 가다가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창작은 끝없는 외로움이고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맞서는 과정이다. 외로운 싸움이란 산통(産痛)을 겪고 태어난 작품을 보고 사람이 공감한다. 예술은 그렇게 또 하루를 먹는다.

대지의 함홍광대 힘으로 멋진 신세계를 만나다

생명2024

늦게 붓을 잡았다. 딸 둘과 아들 둘을 키우느라 힘들게 배운 간호사 일을 짧게 끝내고, 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그림을 전공해서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높아 보였다. 중,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을 떠올리며 나만의 길을 찾으려 했다. 캄캄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경숙 화가는 그렇게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작품의 중심주제는 연결과 조화입니다. 안료(顔料)의 서양적 물성과 한지(韓紙)의 동양적 정신성의 결합으로, 날과 씨로 엮어져 다채로운 세상의 무늬를 만듭니다. 우연적인 요소의 작은 덩어리들은 생명의 씨앗, 무한한 가능성의 잉태를 표현합니다. 저부조의 촉각적 느낌으로 음과 양, 생과 사, 생성과 소멸,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순환을 은유합니다. 화면의 대지 위에 유유한 자연만물의 흐름을 담고자 합니다. - 황경숙, ‘작가노트’에서

생명이었다. 힘들 때마다 붓을 다시 잡게 만든 것은. 모진 눈보라를 견디고 봄이 되면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는 대지의 힘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다시 중심을 잡도록 해준 것은. 가족과 동료의 따뜻한 말이었다. 해마다 개인전을 열면서 다시 할 힘을 얻은 것은…

품을 내준다는 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주어 더 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을 녹음방초로 바꾸는 힘입니다

힘은 다시 믿음으로 거듭납니다
거듭난 믿음으로 따뜻한 사랑이 누리에 넘침니다
사랑이 품을 더 내주니 사는 게 즐겁습니다

즐거우니 웃음꽃이 핍니다
꽃의 달콤한 향기로 누리가 살맛 납니다
살맛은 살아가는 길입니다
품과 사랑과 믿음으로 살길이 넓어집니다

- 홍찬선, ‘크게 품어 밝게 빛나라’ 전문.

황경숙 작가는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1층에서 제10회 개인전을 열고 있다. G-ART갤러리의 부스전 형태로 열리고 있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생명_함홍광대, 162.2x130.3㎝, 캔버스에 혼합재료, 2024’를 비롯, 1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생명_함홍광대(含弘光大)’는 ‘주역(周易)’의 중지곤(重地坤, ䷁)괘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가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생명을 키우는 모습을 나타낸다. 넉넉한 품을 내주는 사랑과, 북풍한설을 녹음방초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작품 ‘생명_토끼굴속으로(Into the Rabbit Hole), 90.0x72.7㎝, 캔버스에 혼합재료, 2024’는 ‘멋진 신세계’를 표현한다. 토끼굴에 빠져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원더랜드’로 가는 것처럼, 두려움을 이기고 설렘에 맡겨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는 권유다.

토끼굴에 빠져 보세요
아직 가보지 못은 새 세상이 반겨줍니다

두려움은 시렁에 잠깐 얹어두고
설렘의 물결에 뫔을 맡기세요

몸이 바람을 탑니다
마음이 숨결을 고릅니다

저 아래 멀리 보이는 옛날이 외치는
돌아오라는 손짓에 미소 보내며 날아갑니다

행동하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만듭니다
역사는 늘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줍니다

- 홍찬선, '멋진 신세계' 전문.

10년, 1만 시간의 역치(閾値)를 넘다

천재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왕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지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자기의 사주팔자가 왕이 될 좋은 운명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은 거지가 되고, 자신의 사주팔자에 연연하지 않고 매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사주팔자대로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1993년에 발표한 ‘1만 시간의 법칙’도 이를 설명한다.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와 아마추어 연주자의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습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말콤 그래드웰은 이런 분석을 받아,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천재성보다는 의도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황경숙 작가도 이제 붓을 잡은 지 10년이 지났고, 그림을 그린 시간도 1만시간 넘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얻었기에 생명의 기쁨을 느끼며 오늘도 붓을 잡는다.

겨우내 얼었던 땅 위로 
봄바람이 솔 솔 솔 불어오니 
들과 뫼와 가슴에 새싹이 뽁 뽁 뽁 솟고
엄마가 큰아들을 낳으니 
함께 하는 즐거움이 온누리에 꽉 꽉 꽉 찹니다

기쁨은 어려움 속에서 오니 먼저 기미를 알고
어려움은 즐거움 뒤에 오니 미리 대비하니
때와 곳을 알지 못하고 나대면 좋지 못하고
때와 곳을 맞춰 움직이면 큰일을 할 수 있으니
철부지 곳부지가 아니라 철지와 곳지가 돼야 합니다

땅 속에서 힘 기르던 우레가 
춘분에 뚫고 나와 하늘로 오르듯이
하늘과 땅에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면 
길을 얻지 못하고 탈이 나듯이 
생명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은 하나이듯이

- 홍찬선, ‘생명의 기쁨’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