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48) 이근배 시인, '아버지의 훈장'으로 시생(詩生) 70년을 조감하다

2025-12-22     홍찬선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아버지와 생이별한 아픔은 어떤 것일까. 10살 때 처음으로 얼굴을 본 아버지와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져 생사(生死)도 모른 채 70년 가까이 살아온 세월은,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문을 잠그는 버릇은/ 문을 잠그며/ 빗장이 헐겁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중략) / 죽을 때까지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문을 못 믿는 이 버릇은”(이근배, '문' 부분)이라고 노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을 것이다. “너는 사상(思想)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냉이꽃' 부분)며 이근배 시인은 깊은 한(恨)을 새겼을 것이다.

팔순에 받은 아버지의 훈장

친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사천(沙泉) 이근배(李根培, 1940~) 시인은 196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벽'으로 당선된 뒤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북위선'이 당선되기까지 신춘문예 6관왕이 됐다. 그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시 '꽃과 왕령'이 우여곡절 끝에 당선취소된 것을 합하면 7관왕이다.

또 1963년에 문공부 신인상에 시 '달빛 속 풍금'과 시조 '산하일기'가 각각 수석상이 됐고, 1964년에 시 '노래여 노래여'가 문공부신인문학상 특상으로 받은 것을 합하면 10관왕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이근배 시인은 또 시인으로는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시인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2019~2021년 재임)을 지내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맺힌 한은 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진 뒤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아버지 생각 때문이었다. 그 한이 2020년에 풀렸다. 그해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에 아버지 이선준 공이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자주 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항일투쟁기인 1935년, 서울 형무소에서 3년 형을 겪은 공적이 뒤늦게 발굴된 덕분이다.

이 시인은 그날의 기쁨을 시 ‘아버지의 훈장’으로 노래했다.

나 태어난 지 여든 해 되어
아버지 이선준에게 주는 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건국훈장애족장'을 외아들인 내게 주었다
세상에! 이런 날이 찾아오다니
하늘, 땅, 바다…, 나라 안의 나라 밖의
우주의 우주보다 더 큰 것들의
비는 손들이 나를 내 온몸을 껴안는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헛나이만 배 속에 채우면서
어둠 속에서 제대로 한 발짝도 못 떼었는데
(중략)
아버지의 훈장은 해보다 더 밝은 해이고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이 되겠지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저는 이제 제가 아니고
한 생애 나라에 살과 뼈 영혼의
영혼까지 다 쏟아부어 수훈하신
훈장을 우러러 눈물 쏟고 있는
작디작은 청맹과니입니다

- 이근배, '아버지의 훈장' 처음과 끝부분.

이근배 시인은 '아버지의 훈장'을 표제시로 하는 시집 '아버지의 훈장'(시인생각, 2025. 10)을 출간했다. '사랑을 연주하는 꿈 나무', '노래여 노래여', '한강',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어하는 까닭을 안다', '추사를 훔치다', '대 백두에 바친다' 등의 시집과 시조집 '동해 바닷속 돌거북이 하는 말', '달은 해를 물고' 및 회고록 '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에 이은 시집이다.

이 시인은 '아버지의 훈장'에서 진달래를 노래한다. 어렸을 때, 고향 당진 봉화산을 “온통 진분홍 물감으로 덮어쓰던” 진달래는 “몰래 숨겨둔 말, 붉은 꽃잎”이며 “해맑은 슬픔 뚝뚝 흘리던/ 그 봄/ 그 꽃”이다.

내게 처음 꽃 이름을 일러준
참, 그 꽃 진달래
먼 천년 넘어 서해 뱃길 트였던
당진 두메산골 북향집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던 봉화산
온통 진분홍 물감으로 덮어쓰던
내 첫봄, 첫 꽃, 첫 계집애이던 것
몰래 숨겨둔 말, 붉은 꽃잎
가슴 안쪽에 무늬로 박힌
참, 참, 참 그 꽃 지금도 내 눈에 아리지
온 나라 벌거숭이 산일 때 지천으로 피던
해맑은 슬픔 뚝뚝 흘리던
그 봄
그 꽃

- 이근배, '참, 그 꽃 진달래' 전문.

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

이근배 시인은 그런 아픔을 '풀꽃'에서 보았다. “흔들리면서 바람 속에 떨면서/ 너는 또 시들어지겠구나” “너의 외로움이/ 이제 마른 잎으로 땅에 눕겠구나” “아름다움은 한 평 땅에 묻히고” “아무 구원도 갖지 못한다”며 풀꽃을 보며 자신의 아픔을 달랬다.

흔들리면서 바람 속에 떨면서
너는 또 시들어지겠구나.
지고(至高)의 목숨을 울면서
일체를 거부하던 너의 외로움이
이제 마른 잎으로 땅에 눕겠구나.

비록 여린 바람에 흔들려도
너의 뿌리는 뜨거운 눈물에 젖어 있던 것.
그러나 아름다움은 한 평 땅에 묻히고

나는 너의 흐느낌에 매달려

허용받지 못한다.
아무 구원도 가지 못한다.
건널 수 없는 이 많은 시간
너의 쇠잔한 꿈의 곁으로 가는
한 가닥 나의 사랑의 빛.
먼 데서 오는 너의 가녀린 숨결을 들으며
부자유 속의 나의 영혼은
이 가을 시름거리며 앓는다.

- 이근배, '풀꽃' 전문.

이근배 시인은 2024년 12월에 육성회고록 '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을 출간했다. 해방둥이로서 한글로 정규교육을 받아 문학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부터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에서 받은 문학 수업을 받던 시절과 사실상 10관을 차지한 사정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오상순 김관식 김광주 천상병 이현우 김성우 이문구 황석영 이청준 김지하 조오현 이어령 고은 김남조 등 문인과의 인연 및 ‘청년문학가협회’, 3대 필화사건과 문인간첩단 조작사건 등, 지난 70여년 동안 일어났던 한국문단의 역사를 생생하게 펼쳤다.

한국문학의 70년을 담았다

한글둥이로
신춘문예 10관왕의 기록으로 
문단사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청년문학가협회의 대표간사로
한국문학 민족과문학 문학의문학을 이끈 경영자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으로
독립유공자 아들로 
왼쪽과 오른쪽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품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한국문학 70년의 정사와 비사를
육성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기존의 문학인에게는 지나온 길 돌아보는 계기를
앞으로 문학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알아야 할 역사를
객관과 주관을 하나로 버무려 재밌게 알려주었다

70년의 한국문학이 그대로 펼쳐졌다

- 홍찬선, '이근배의 시생 70년' 전문

벼루전시회

이근배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벼루 사랑도 특별하다. 벼루는 종이 붓 먹과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로서, 그 중의 으뜸으로 여긴다. 이 시인은 50여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 등을 돌아다니며 벼루를 모았다. 때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연벽묵치(硯癖墨痴)의 전통을 되살리려고 발품 눈품 돈품을 팔았다.

나라 박물관도 하지 못하는 일을 혼자 하면서 벼루 1000여 점을 수집했다. 15세기 한글이 새겨진 ‘니가완은대월’ 벼루와 15세기 생활풍속이 조각된 ‘농경풍속도일월연’ 벼루 등은 문화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 491쪽에서 인용).

이 시인은 2021년 6월, 평창동의 가나아트센터에서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전을 열었다. 신춘문예에 등단한 지 60주년을 기념하고, 나날이 잊히는 벼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시 쓰기 예순 해도 보통 사람 아닐텐데
존 벼루 가려낸 맘 더욱 더 놀랍고나
아마도 앞선 한 삶은 석봉 추사 일러라

남의 말만으로는 알지 못한다
기계가 전하는 사진으로도 가늠하기 어렵다
발걸음만이 깊고 넓은 맛 그대로 알려준다

화살처럼 내리꼿는 뜨거운 햇살과
뺑덕어미처럼 불쑥 퍼붓는 장대비를
뚫고 오르막을 가슴으로 오른 뒤에야
느긋하게 풀어놓는 멋을 누린다

하늘연못 물을 머금어 발갛게 핀
위원화초석 벼루에 즈믄 가람에 비친
밝은 달 주인의 붓결 숨결이 살고

편안함을 지키는 땅 성주산의
남포석 기를 받은 벼루에는
말과 글로 다 못 전한 사연이 빼곡하다

한사람이 하기엔 어려운 일을
열 스물 서른 해론 어림없는 일을
해낸 것은 뚝심과 혜안,

육십년이나 시를 쓴 
시인은 자꾸 핑계대려는 게으름쟹이에게
화초석 남포석 벼루로 호통치신다

- 홍찬선, '사천(沙泉)의 벼루' 전문.

시집 '아버지의 훈장'에 실린 시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는 엄마를 가진 이 나라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사랑뿐이셨어요/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는” “세상의/ 어머니 손은 모두/ 하늘이요 땅이지요”를 읽으니 33년 전에 귀천한 엄마가 생각난다.

이름 따로 있던가요
어머니는 모두 어머니지요

사랑뿐이셨어요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는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그냥 어머니
어머니지요

나는 손이 둘인데
어머니는 백 손이지요

비는 손 다 보태면
천도 만도 되지요

세상의
어머니 손은 모두
하늘이고 땅이지요

- 이근배,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