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46) 풍월당서 장석주 시인 및 바리톤 크바스트호프와 ‘교양의 쓸모’를 생각하다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오늘 또 하나의 보석을 찾았다. 서울 곳곳에 숨어 어서 찾아오라고 말없이 외치고 있는 보석을 찾은 날, 그날은 바로 행복한 날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이 일어난다. 삶은 감춰있는 보석을 찾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압구정로데오거리에 있는 풍월당에서 장석주(1955~) 시인과 ‘교양의 쓸모’를 함께 생각하는 보석 덕분이다.
‘교양의 쓸모’를 깨닫게 한 바리톤 크바스트호프
장석주 시인의 신작 '교양의 쓸모'(풍월당, 2025.11)의 출판기념회가 풍월당에서 열리는 날이다. 풍월당(風月堂)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한 문화공간이다. 지하철 수인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4번 출구에서 가깝다. 의사이자 음악칼럼니스트인 박종호 선생이 2003년에 만들었다.
풍월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줄임말이며, 풍월당은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비추는 집’이라는 뜻이다. 각박해지는 도시에서 자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에 잘 맞는 집이다.
출판기념회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24번째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박종호 선생은 쓸쓸하고 힘든 일을 하는 장석주 시인에게 잘 맞을 것으로 여겨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마을 뒤 저편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최선을 다해 연주하네
맨발로 얼음 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려도
그의 작은 접시는 항상 텅텅 비어 있네
아무도 그를 들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네
개들만 으르렁거리며 노인의 주변을 맴도네
그는 상관하지 않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연주하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네
기이한 노인이여
나 그대와 함께 가리까
나의 노랫소리에 맞춰
악기를 연주해 주겠소
- '거리의 악사', 뮐러 시, 슈베르트 작곡.
이날 감상한 '거리의 악사'를 부른 가수는 독일의 세계적인 바리톤 크바스트호프였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클래식애호가들이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토마스 크바스트호프(Thomas Quasthoff, 1959~)는 독일 힐데샤임(Hildesheim)에서 태어난 세계적 베이스-바리톤 성악가다. 그는 ‘탈리도마이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다리뼈가 자라지 않아 키는 132㎝에 불과하고 해표지증(海豹肢症, phocomelia)으로 팔이 거의 없고 손가락은 7개에 불과하다.
‘탈리도마이드 장애’란 독일의 제약회사 그뤼넨탈이 1957년에 시판한 진정,수면제 ‘콘테르간’을, 초기 임산부가 입덧을 줄이기 위해 복용한 데 따른 부작용으로 생긴 장애다.
1958년에 첫 기형사례가 보고됐고, 1960년 함부르크의 비두긴트 렌츠가 문제를 제기했으나 회사(구뤼넨탈)는 부인했다. 독일에서 5000여명을 포함, 전 세계에 1만2000여명의 장애자가 태어나자 독일은 1961년, 일본은 1962년에 판매가 금지됐다.
두 팔이 없고
손가락도 일곱 개 뿐이라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굳센 의지로 웃으며 받아들였다
엄마가 입덧을 줄이려고 수면제를 먹어
키가 자라지 않고 두 손이 어깨에 붙었어도
피아노를 칠 수 없어 하노버음악대학 입학을 거부당했어도
노래 부르는 것을 너무 좋아했기에
성악가가 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은 열리게 마련이었다
하노버법대에 입학한 뒤 음대로 전과해서
성악가는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짐을 보여주었다
남들에겐 기적이었지만
스스로에겐 남몰래 흘린 눈물탑이었다
- 홍찬선, '바리톤 토마스 크바스트호프' 전문.
열세 살 때부터 성악을 배운 크바스트호프는 하노버음악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당시 피아노 연주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학시험이었는데, 팔이 없고 손가락도 7개여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노버대학교 법대에 입학한 뒤 성악과로 전과(轉科)했다.
1988년 뮌헨 국제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고, 유명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에게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다. 1996년 모스크바에서 쇼스타코비치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에든버러음악축제에서 하마다신탁/스코츠맨축제상을 받으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9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하고, 2000년에 메조소프라노 ‘안네 조피 폰 오터’와 함께 클라우디어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필하모닉 반주로 그스타프 말러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연주한 앨범이 최고 클래식보컬로 그래미상을 받았다. 2008년에도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베를린필하모닉 등과 협연한 앨범 '브람스: 독일 레퀴엠'으로 최고합창작품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토마스 크바스트호프의 형 미하엘이 정리한 자서전 '빅맨 보이스'(김민수 역, 일리, 2005)가 한국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장석주 시인이 말하는 ‘교양의 쓸모’
크바스트호프가 부른 ‘거리의 악사’를 들은 장석주 시인은 “울컥했다”고 했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의 운명이 ‘거리의 악사’와 비슷하게 하염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장 시인은 열네 살 때 처음 시를 썼고, 중학교 2학년 때 ‘바위’라는 시로 ‘학원’에서 우수상을 받았지만, 그때만 해도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썼다. 스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써서 일흔 살이 됐다. 50년 동안 1000여편의 시를 썼는데도, 여전히 시는 어렵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싶을 때가 많단다.
그는 예술가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때 만들어진 허구라고 지적했다. 천재는 카바스트호프처럼 철저히 단련과 수련의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치열한 훈련으로 작품 양을 쌓으면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 질적 비약을 이루는 것이다. 물에 열을 가하면 뜨거워지다 100℃를 넘으면 액체에서 기체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1993년에 발표한 ‘1만 시간의 법칙’도 이를 설명한다.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와 아마추어 연주자의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습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최고 연주자들은 1만 시간 이상 연습한 반면 중간은 8천시간, 하위 그룹은 4천시간 정도 연습했다는 것이다. 말콤 그래드웰은 이런 분석을 받아,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천재성보다는 의도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낙타가 아니라 포효하는 사자로 살자. 철학자 니체는 ‘비둘기 떼와 함께 오는 웃는 사자’는 시련을 뛰어넘는 개척자, 강건한 존재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낙타란 주인의 명령에 순은하는 피동의 존재다. 낙타가 비루한 처지가 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탓이다. 사자처럼 강인한 존재만이 자유에의 의지에 자신을 비끄러맨다. (중략) 하루가 신이 공평하게 나누어준 선물이라면 우리는 희망과 기쁨으로 설레며 하루를 시작해야 마땅하다. 새날을 맞고, 아침에는 아삭아삭 사과를 깨물어 먹자. 심호흡을 하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바라보자. 안락보다는 심장이 뛰는 삶을 살자. 우리 안의 비굴함을 떨쳐내고 비둘기와 함께 돌아오는 사자의 웃음을 배우자” - 장석주, ‘웃는 사자가 온다’, 『교양의 쓸모』, 99~100쪽.
장 시인은 ‘웃는 사자가 온다’가 자신의 인생 서사가 숨겨 있다고 밝혔다. 실업고 2학년을 중퇴하고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열아홉 살의 쓸모없는 존재로 자기모멸감을 느끼며 미래가 없다고 느꼈을 때,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들어왔다. 흔히 니체는 니힐리즘(허무주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지만, 그는 놀랄만한 긍정주의자다.
니체는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3단계를 제시한다. 사람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천재지만, 세태에 길들여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면서 낙타의 인생을 산다는 지적에 크게 깨달았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한글로 중역(重譯)한 니체의 저서를 읽으면서, 니체 전집을 한글로 완역해 출판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24세 때 시와 평론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다가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10권으로 된 니체전집을 완간했다. 니체는 나의 최초이자 최고의 스승이었다.
장석주 시인은 교양을 “사람이 스마트한 삶을 살아가는 실존 스킬(Skill)”이라고 정의한다. 흔히 교양이 밥 먹여주느냐고 하지만, 생존에 가장 적합한 것이 교양이라는 말이다. 어렸을 때 모두 가난했지만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면서 이기적이고 타락하면서 교양인이 사라졌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양이다.
현재 사람에게는 ‘읽는 뇌’가 있다. 하지만 600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읽는 뇌가 발달하지 않았다. 21세기에 사람의 뇌는 읽는 것보다 ‘디지털 뇌’로 진화하는 양상이다. 디지털 뇌를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만, 정보과부하 상태에 빠져 끊임없는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 종이 책을 읽으면 참을성이 생긴다. 하지만 디지털뇌는 인내심이 없다. 나를 만든 것은 책이다. 디지털 시대이지만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인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장석주 시인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의 시 ‘대추 한 알’이 떠올랐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장석주, '대추 한 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