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가라앉는 프랜시스 外

- [비평연대] 맹준혁·이수련·김미향의 500자 서평

2025-12-12     김리선 기자

내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인터뷰365 편집자주]

■ 가라앉는 프랜시스(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2025)

“그렇지만 어떨까요? 사실은 누구나 그저 흘러갈 뿐이잖아요. 무언가가 운반하듯이 어느 틈엔가 도달한 곳에 사람들은 서 있는 거예요. 바람에 운반되는 씨앗이나 마찬가지로, 어디에 있든 여행지 같은 거지요. 여행지니까 사람들은 쉽게 맺어지고 말이죠.” (가라앉는 프랜시스 中)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 도쿄에서의 정돈된 삶을 뒤로하고 내려온 게이코, 소리를 수집하며 강가의 집에서 지내는 가즈히코. 이 소설은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드는 이야기이지만, 읽다 보면 인물만큼이나 눈에 들어오는 건 마을의 풍경이다. 눈의 냄새, 나무의 촉감, 물빛과 물소리, 바람의 온도. 모든 풍경을 감각적으로 잘 그렸다. 읽는 내내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 속 ‘물빛의 이미지’를 문장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연에 관한 묘사뿐 아니라, 남녀의 사랑까지 그렇게 감각적으로 그려서, 오히려 모든 게 덧없어 보이기도 했다.

책을 덮고 삿포로에 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비행깃값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대신 연말엔 잠깐 교토에 머물기로 했다. 같은 일본이고, 여행 전까지 다른 일본 소설을 읽을 것 같지도 않으니, 이번 여행은 아마 이 소설의 눈으로 일본의 풍경을 보게 될 것 같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맹준혁<br>

■ 기쁨의 황제(오션 브엉, 김지현 옮김, 인플루엔셜, 2025)

시 쓰기를 처음 배웠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시는 은유와 함의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시공간을 짓는 일이라는 점 이었다. 시인의 말과 단어는 세밀한 볼트와 스크류, 합판과 알루미늄처럼 기능한다. 산문 시인으로 처음 알려진 오션 브엉의 첫 장편 소설은 그 점에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혼자가 된 소년이 도망쳐온 가상의 도시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며 만나는 인물 역시 그렇다.

마약중독으로 애인을 잃고 엄마한테 의대를 입학했다며 거짓말하고 가상 도시 글래드니스의 재활 시설로 들어온 ’하이‘는 철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그를 발견하고 소리친 노인 ’그라지나‘를 만난다. 라트비아가 고향인, 스탈린과 나치 시대로 종종 회귀하는 치매 노인 그라지나와 이제 막 재활시설을 나온 베트남계 소년 하이는 파괴된 삶의 터전의 공백에 새로운 터전을 만든다.

소설은 하이가 동네의 체인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장면, 치매에 걸린 그라지나와 전쟁 놀이를 하는 일상적 장면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인다. 세상이 이미 잊어버린 흉터를 몸에 새긴 이들의 일상은 길고 정성스러운 묘사에 의해 실존하는 상처로 형상화된다. 나열된 단어들은 허공을 떠도는 대신 그 인식의 시간속 구조를 만들어준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한번만 사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잊혀지고 소외된 상처의 연결을 통해 집단의 기억으로 남는 가능성을, 그래서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삶으로 보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이수련 / 비평연대)

이수련<br>

■ 거인의 노트(김익한 외 지음, 다산북스, 2023)

12월은 돌아보는 달이면서 동시에 설계하는 달이다.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지 않은 채 새해의 목표를 세우면 계획은 쉽게 공허해지고, 반대로 회고에만 머무르면 내년을 향한 방향은 흐려진다. 그래서 이달에는 무엇을 더 잘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 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묻게 된다. 그런 점에서 '거인의 노트'는 연말의 회고와 새해의 계획 사이에 놓기 가장 적절한 책이다. 다음 해를 준비하는 사고의 토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록을 삶의 부수적인 습관이 아니라, 방향을 만드는 핵심 도구로 다룬다. 한국기록학회장과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을 역임한 저자 김익한 교수는 기록을 통해 이론과 실천이 연결되고, 생각이 축적되며, 개인의 인식이 확장된다고 말한다. 매년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이유, 열심히 살았는데도 남는 감각이 없었던 이유를 저자는 기록의 방식에서 찾는다.

책의 제목부터 내용 전반을 관통하는 “난쟁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면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비유는 연말에 특히 실감 나게 다가온다. 지금의 나는 아직 방향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일지라도, 매일의 기록은 결국 나를 들어 올리는 발판이 된다. 새해의 계획이 막연한 희망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그 계획이 올라설 ‘거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일러준다.

'거인의 노트'가 실용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기록을 무겁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쓰지 말고 핵심만 남길 것,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 대화와 생각은 그대로 옮기지 말고 맥락을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라는 조언은 기록을 일상의 기술로 끌어내린다. ‘100개 중 중요한 10개만 보관한다’는 기록의 핵심은 기록이 곧 ‘평가와 선별’의 영역임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기록을 공부, 생각, 일상, 일, 관계 전반으로 확장시키며, 삶 전반을 다시 설계하게 만든다. 성장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고민이 반복될 때, 계획이 늘 흐지부지될 때 기록은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거인의 노트'는 새해의 목표를 몇 줄로 적기 전에, 내가 어떤 생각들을 쌓아왔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단순히 기록을 잘하기 위해 읽기보다는 내년의 방향을 조금 더 나답게 세우고 싶은 분들에게 12월에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책이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김미향<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