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45) 오산고에서 백석 시인과 이중섭 화가를 뵙다

2025-12-10     홍찬선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새로운 길을 나선다. 반포대교를 넘어 보광동 쪽으로 우회전했다가 좌회전과 우회전을 한 뒤 다다른 곳, 많은 사람이 이미 지나간 길이지만 필자는 처음 가는 길이다.

김소월과 백석 시인, 이중섭 화가 그리고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오산중, 고등학교다. 오산학교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선생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학교로 1907년 12월24일에 개교했다.

항일독립투사 길러낸 민족오산학교

오산고

남강 선생의 본명은 이인환(李寅煥)이며, 승훈은 자(字)다.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출생, 어려서 부모를 잃고 16세에 유기상에서 일을 시작해 보부상으로 10년 만에 대상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파산하고, 오삭주(본명 오희순)에게 신용으로 돈을 빌려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일제강점기 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의 강연을 듣고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며, 오산학교를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오산고

남강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禪師)와 사이좋게 지냈다. 남강 선생은 “나라가 있어야 종교가 있지!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며, 불교와 거리를 두려는 기독교인들을 나무랐다. 남강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서 “겨레의 광복을 위해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쉼 없이 전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훈(遺訓)은 오산고 교정에 비석으로 새겨져 후손들을 가르치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니도…
오산학교는 그냥 오산중고가 아니었다

백석 시 가운데 가장 뜻이 깊은 <모닥불>이 
잔디밭 하얀 돌에서 다소곳이 시인의 마음을 전해주고
한강을 호수로 삼고 관악산을 천주산으로 삼은 
교정에선 이중섭의 소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교장실로 가는 복도 벽에서는 백두산 범이
백두호는 범 중의 범이고 우리들은 어디를 가든 오산이라 호령하고
남강 고당 노호 동광 씨알 다섯 분이 다섯 뫼로 우뚝 서
118년 동안 한결같이 겨레의 마룻대와 대들보 되라고 깨우쳐 준다

정주에서 터전을 잡은 오산고는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뚫고 용산으로 옮긴 오산학원은
사랑과 정성과 존경의 가르침을 잃지 않는 오산학원은
그냥 오산중,고등학교가 아니었다

- 홍찬선, '민족오산학교' 전문.

민족오산학교, 김소월 백석 이중섭 황순원을 키웠다

오산학교는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 선생이 교장을 지냈고, 씨알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소설가,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설립자 등이 민족오산학교 출신이다.

"오산고

남강 선생의 ‘유훈비’ 옆에는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화가의 추모비가 있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나, 1930년 오산고보에 입학해 임파(任波) 임용련(任用璉, 1901~?) 선생에게 미술을 배웠다. 졸업하고 동경(東京)의 제국미술학원 서양학과와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오산고보 4년 선배인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을 존경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제주도 서귀포와 통영 앞 욕지도 등에서 그림을 그렸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산고 교정에 이중섭의 대표작을 전시한 ‘이중섭광장’이 있다.

이중섭 화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황소'(종이에 유채, 35.3×51.3cm, 1953~1954년경)도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옆에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오산고

“‘소’는 이중섭이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린 대표적인 소재로, 그의 예술세계와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이다. 소는 인내와 끈기의 상징이자,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족적 정신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그것은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던 예술가 자신을 투영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1954년, 통영과 진주에 머물던 이중섭은 예술적 열정이 절정에 달하며 수많은 ‘황소’와 ‘흰 소’ 연작을 남겼다. <황소>는 강렬한 붉은 배경 위에, 세파를 견딘 주름진 황소의 얼굴을 거칠고 단단한 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거친 필선과 강한 색채는 고통과 분투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황소의 눈빛에서는 온기와 생명력이 느껴진다. 힘찬 선의 리듬과 화면을 압도하는 붉은 색조는 절망을 이겨낸 의지의 상징이며, 작가의 혼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이중섭에게 황소는 단순한 동물이 아닌 ‘존재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그가 겪은 시대의 아픔과 불굴의 정신을 응축한 형상으로 거칠지만 뜨겁고, 고독하지만 숭고하다. 네 점으로 알려진 ‘황소’ 연작 가운데 이 작품은 특히 작가의 열정과 인간적 강인함이 가장 밀도 있게 드러난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잘 설명한 명문이다. 다만, 필자는 '황소'의 소는 ‘황소’가 아니라 ‘숫송아지’라고 생각한다. 우선 맑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아련함이 배여 있는 눈동자는 황소의 그것이 아니다.

배경이 붉은빛인 것으로 보아 저녁노을이 발갛게 물들 때, 숫송아지가 엄마 소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황소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코뚜레도 보이지 않고, 입에 난 이빨도 황소가 아니라 송아지의 이에 가깝게 여겨진다.

반쯤 벌린 입은 “매에에~” 하며 엄마를 부르는 모습이 생생하다. 머리에 난 뿔도 황소의 거친 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송아지의 뿔로 보인다. 이는 이중섭이 그린 다른 ‘황소’ 그림과 비교해봐도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산고

이중섭 광장을 돌아 나와 오산고 교사(校舍) 뒤쪽으로 가자 다섯 분의 흉상(胸像)이 있다.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선생, 오산고 교장을 지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 선생,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를 용산에 재개교하는데 크게 기여한 노호(蘆湖)는 김기홍(金起鴻, 1899~1962) 선생, 동광(東光)은 주기용(朱基瑢, 1897~1966) 선생, 씨알은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 등이다. 민족오산학교의 빛나는 118년 역사가 있게 한 분들이다.

오산고

그 옆에 아담한 시비가 잔디밭에 놓여 있다. 백석(白石, 1912~1963)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2011년 7월1일에 세운 시비다. 시비에는 백석의 시 '모닥불'이 새겨 있다. 1936년 1월에 백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간된 시집 '사슴'에 나오는 시다. 일반인들이 익숙하게 아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아니라 '모닥불'을 새겼다는 사실은 오산학교가 그냥 학교가 아니라 ‘민족오산학교’임을 보여준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나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전문 

백석은 남녀노소와 부귀빈천은 물론 동물까지도 아우르는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모닥불'을 썼을 것이다. 불쏘시개를 열네 개, 불 쬐는 사람도 열넷으로 맞춘 것은 그런 이유에서로 보인다.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대동(大同)사회를 그린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억압받고 살고 있지만, 참고 견디며 싸워 이겨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자는 뜻이다. 백석은 또 모닥불이 갖는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도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크는 아픈 현실과,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채 몸뚱이만 남아 있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새로운 날을 준비하자는 다짐을 보여준 것이다(홍찬선, '백석의 불시착'(스타북스, 2025.2), 126쪽에서 인용). 오산학원은 백석의 그런 뜻을 파악해 시비에 '모닥불'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범 중의 범은 백두산호, 오산인은 어디 가든 오산인

오산고

오산중고등학교가 민족오산학교인 것을 알려주는 것은 또 있다. 이호승 교장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복도에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하는 말이 눈에 확 띄었다. 이 말은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에 범으로 불리나니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라고 하는 '오산경가' 중에 나오는 글귀다.

범은 ‘호랑이’의 순 우리말이다. “범띠 가시내” “범 내려온다” “범고래” 등에서 범이라는 우리말은 널리 쓰이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창제동기와 창제원리 및 활용사례 등을 밝힌 책 '훈민정음(訓民正音)'에도 “虎는 범으로 쓴다(범爲虎)”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호랑(虎狼)’은 범을 뜻하는 호(虎)와 늑대를 가리키는 랑(狼)을 함께 부르는 복합명사이다. ‘호랑이’는 호랑에다 접미사 ‘-이’를 붙인 말이다. ‘호랑이’는 범과 늑대를 함께 부르는 말이지, 절대로 범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범이라는 우리말 대신 ‘호랑이’라는 국적 없는 말이 마치 우리말인 것처럼 쓰이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일제가 배달겨레의 상징동물인 범을 멸종시키기 위해 정호군(征虎軍)까지 만들어 배달겨레의 얼을 없애려고 한 때와 거의 맞아떨어진다. 범을 늑대로 격하시킨 호랑이 대신 범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민족오산학교에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범’을 찾기 위해 몇해 전에 만든 노래 '범 나가신다'를 소개한다.

범 나가신다. 호랑이 가라
용맹하고 늠름한 겨레 얼이로다.
팔천만 하나되어 자주 문화강국 
가거라, 비켜라, 호랑아. 우리범 나가신다.

범 나가신다. 호랑이 가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배달 말글로
반만년 금수강산 찬란히 비추리라 
가거라, 비켜라, 호랑아. 우리범 나가신다.

- '범 나가신다'(노랫말: 홍찬선 강순예, 작곡: 전영준) 전문.

1907년 12월24일에 개교한 오산학교는 배달겨레의 핵심사상인 ‘하늘땅사람(天地人)’을 교표(校標)에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교표는 위에서부터 파랑 빨강 노랑의 3색으로 되어있다. 파랑은 하늘로서 자유와 존경을 상징하며, 빨강은 사람으로서 평등과 사랑을 뜻하고, 노랑은 땅으로 평화와 정성을 가리킨다.

오산고

교훈 “사랑(愛) 정성(誠) 존경(敬)”도 이와 관련돼 있다. 교표에 있는 두 개의 하얀색은 2천만 겨레를, 3색은 3천리 금수강산을 뜻하기도 한다. 별 모양은 학교의 위치를 가리키며, 가운데의 ‘山’은 정주에 있는 ‘남산 천주산 제석산 황성산 연향산’의 다섯 산을 뜻한다.

교목(校木)인 잣나무는 항상 푸르름을 지니고 기품있게 꿋꿋이 뻗는 오산의 정기를 상징하고, 교화(校花)인 무궁화는 고난 극복의 강인한 의지와 다함이 없는 나라꽃과의 일체감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