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안혜초 시인의 ‘초승달이 윙크를 하네’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초승달이 윙크를 하네 / 안혜초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살짝 찍힌
그 담날 초저녁
울적한 심사로
우리 아파트 현관문 밖의
돌층계를 내려서다가
어느 순간 눈길이 끌리어 간
건너편 나뭇가지에서
초승달이 윙크를 하며
까짓거 털어버리라구
기분 좋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들을
생각하기에도
우리네 하루하루는 너무
짧은 게 아니냐구
―'푸르름 한 줌' (오름, 2023)
안혜초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통해 시단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장식보다 절제된 언어와 고요한 감각을 중시하며, 일상 속 자연과 존재의 숨결을 투명한 시선으로 길어 올리는 서정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귤·레먼·탱자’, ‘달 속의 뼈’, ‘쓸쓸함 한 줌’, ‘푸르름 한 줌’, ‘살아있는 것들에는’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일상의 순간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지며, 관념적 수사를 지양하고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시를 쓰고 싶었다”라는 말처럼 담백함과 성실함, 생명에 대한 깊은 공감이 담겨 있습니다.
창작 활동 외에도 문단과 언론계를 위해 꾸준히 힘써 왔습니다. 세계 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국제 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 현대 시인협회 지도위원, 한국기독교 문인협회 고문,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약하며 문학적·사회적 기여를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단순히 작품을 쓰는 시인을 넘어, 한국 시단의 토양을 지키고 후배 문인을 돕는 데도 헌신해 온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2011년 제14회 한국문학예술상 대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집 ‘푸르름 한 줌’으로 한국PEN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다시 인정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윤동주문학상, 영랑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미당시맥상 등 여러 상을 통해 한국문학의 다양한 영역에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한영대역 시집과 중국어역 시집 출간을 통해 해외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한국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세계로 넓혀가고 있는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