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44) 숨겨진 금석문에서 남한산성 역사와 문화를 새김질하다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남한산성이 유원지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남한산성을 시민의 여가시설로 여겼던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광주유부수 폐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군사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은 일찌감치 잃었지만, 행정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은 그나마 1916년까지는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여전히 많은 사람이 남한산성과 그 일대를 오가며 항일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행정중심도시로서의 남한산성의 의미마저 퇴색시키려 1917년 광주군청을 경안동으로 이전해버립니다. 이 시점부터 남한산성은 일종의 역사문화답사장소나 등산코스, 데이트 장소 등 여가를 즐기러 갈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시민의 행락지로 빠르게 개방된 남한산성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아예 서울 근교의 유원지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남한산성에 또 한 번 변화의 계기가 온 것은 1971년 3월,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입니다. 이 시기부터 남한산성은 ‘문화재와 자연을 즐기는 관광지’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2014년에 세계문화유선의 하나라 등재되기에 이릅니다.
- ‘산성마을의 수난시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전문.
남한산성 금석문을 김태홍 작가의 사진으로 만나다
남한산성은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나고 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溫祚)대왕의 숨결이 숭렬전에 깃들어 있고, 행궁에는 신라 때 건물터가 남아 있다. 옥천정과 벌봉, 병암 등에는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선조의 역사를 증거한다.
병자호란의 치욕적 항복으로 각인된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만나러 만해기념관(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92번길)에 다시 갔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지은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시집 ‘님의침묵’의 1926년 초판본과 만해의 글씨를 직접 볼 수 있는 곳, 이번에는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김태홍 사진작가의 ‘남한산성 금석문’ 개인사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남한산성은 금광이요 김태홍 작가는 광부다
흙 아래 바위 밑에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있는
보물을 캐낸다
봄 여름 갈 겨울
아침 비 저녁 눈
가리지 않고
두루미 긴 고개 내밀고
하루를 세 해처럼 기다리며
곡괭이질 한다
보물이 나타날 때까지
곱은 손가락이 딸각 노래할 때까지
강산이 네 번 바뀌고 있어도
마음,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마음,
남한산성이 말하는 것을 오롯이 전해주려는 그 마음은
꽃으로, 문으로, 성벽으로, 금석문으로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이어진다
- 홍찬선, ‘김태홍 사진작가’ 전문.
김태홍 작가는 1954년 생이다.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난 갑오년(1894년)의 60년 뒤에 태어났으니 올해 72세다. 고희(古稀)도 지난 어르신이지만 외모는 환갑도 되지 않아 보인다.
1973년부터 카메라를 잡고,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찍은 덕분이다. 1991년부터 35년 동안 남한산성을 사진에 담았다.
남한산성의 문과 성벽, 남한산성에서 피는 야생화, 남한산성 곳곳의 바위에 남아 있는 금석문을 주제로 개인전을 10번이나 열었다. 이번 ‘남한산성 금석문’ 사진전은 12월2일부터 12월31일까지 열린다. 남한산성 한용운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들을 보고 그냥 지나칩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바쁘게 하루일과를 마치는 일이 익숙하죠.
하지만 남한산성의 돌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그 오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고
조용히 우리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금석문은 단지 기록이나 장식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지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손길과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한 자 한 자에 담겨 있지요.
이번 사진전을 통해
이 작은 흔적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시길 바랍니다.
더러는 희미해진 글자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남한산성의
또 다른 역사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김태홍, ‘전시회를 열며’에서.
김태홍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남한산성 곳곳을 올라 사진을 찍고, 남한산성을 알릴 사진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남한산성은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언제 어느 곳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다음 전시회는 ‘백성들이 관료에게 드린 훈장’(가칭)으로 정해놓았다. 무슨 내용의 사진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관심이다.
사진전에서 소개된 금석문 설명
남한산성 동문 옆의 암문(暗門)인 시구문을 나가 개울을 따라 240여m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에 ‘己亥駐蹕’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기해주필(己亥駐蹕)은 기해년(1799년)에 임금(정조, 正祖, 1752~1800)가 머문 곳이라는 뜻이다.
당시 수어사였던 김종수(金鍾秀, 1728~1799)가 정조의 교지를 받아 쓴 것이다. 己亥駐蹕 오른쪽 면에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새겨 있다. 일제강점기인 대정(大正) 13년(1924년) 4월에 새긴 것이다. 일제의 문화재파괴의 현장 중 하나다.
보이는 것만 들으면
지금 자동차 달리는 길이
이백 년 전에도 있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
근시증후군이다
계곡 너머 나무 우거진 곳에
연(輦)과 우마차 다니던 큰길이 있었다는 걸
己亥駐蹕이 새겨진 바위가 알려주고 있는데
길은 희미해 더듬더듬 남아 있고
길옆 철벽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가슴이 미어지는데
음모가 있었을 것이다
음모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己亥駐蹕 곁에 南無阿彌陀佛을 새긴 음모!
바로 보아야 참맛을 느끼고
참 소리 들어야 참모습 듣는다
- 홍찬선, ‘주필암’ 전문.
행궁 오른쪽으로 좌전을 지나 계곡으로 오르면 옥천정(玉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이 나온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조그만 폭포인 풍애폭(楓愛瀑)이 있고, 그 옆에는 당시 광주유수겸 수어사였던 심상규(沈象奎, 1766~1838)가 지은 시가 새겨있다.
古松奇石閟雲扃(고송기석비운경)
詞護千年賴地靈(사호천년뇌지령)
他日欲尋聞夢處(타일욕심문몽처)
泠然秋水玉泉亭(영연추수옥천정)
나이 든 소나무 기암괴석 구름에 가려져
천년 보살핌 받으니 땅 신령 덕분이라네
훗날 한가로이 꿈 꿀 곳 찾고자 한다면
맑은 가을물 샘솟는 이곳 옥천정이로다
- 심상규, ‘옥천정(玉泉亭)’ 전문.
옥천정으로 가는 길에서 최근 점가교(漸佳橋)라는 바위글씨가 발견되면서 다리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점가교’의 점가(漸佳)는 갈수록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진다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준말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옥천정’과 ‘점가교’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풍애폭’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폭포도 자취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계곡이 눈비에 많이 무너져 내렸다. 금석문, 바위글씨로만 남아 있는 그 옛날의 아름다운 경치를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사람은 세월의 법칙에 따라 가고
정자와 다리도 사람 따라 없어져도
바위와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어렴풋이 남아
그날의 역사를 소곤소곤 알려준다
남한산성 행궁과 좌전 뒤에
정자를 세운 것은 괘씸죄였을까
물길이 말라
사람 발길도 끊어졌을까
버려진 골짜기에 비밀이 가득하다
사람의 손을 덜 탔다는 건
그 모습 그대로 간직했다는 것
잡풀들이 꾸역꾸역 반역을 꾀하는데
비바람과 산새와 들꽃들을 벗 삼은
그 사람이 자꾸 말을 건다
돌에 갇힌 역사를 끄집어 내라고
벽에만 팔린 한 눈 똑바로 뜨라고
- 홍찬선, ‘옥천정’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