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에고’를 중시하는 사회에 필요한 ‘처방’...알렉산더 에크만의 '해머'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 × 스웨덴 무용단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

2025-12-04     주하영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알렉산더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에고(Ego)란 무엇일까? 라틴어의 1인칭 대명사로 ‘나’를 뜻하는 ‘에고’는 20세기 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본능(Id)과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현실에 따른 조율된 선택을 하는 ‘자아’로 정의되었다.

이후 1950년에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정체성 발달과 위기에 관한 이론이 발표되면서 심리 사회학의 큰 성장과 ‘에고’, ‘자아’, ‘자아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현재에 ‘에고’는 주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혹은 자존감을 의미하지만, 심리학과 철학, 뇌과학 분야에 따라 자아와 에고는 조금씩 다르게 해석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개인주의’는 근대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쳐, 자아의 중요성과 함께 20세기의 핵심 가치이자 기본 가치로 자리 잡았고, ‘자기표현’을 강조하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나’를 가장 우선시하기에 이르렀다.

기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셜 미디어(SNS)는 자기표현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고, ‘좋아요’와 ‘팔로워’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부추겼다.

‘자신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 자신의 중요성 혹은 능력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되는 단어인 ‘자아’는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자기 이미지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이상화하는 심리 현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자기중심적 사고와 우월성 추구의 경향과 함께 공감 부족과 분열,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스웨덴 출신의 현대무용 안무가로 강렬하고 기발하며 혁신적인 작품들을 선보여온 알렉산더 에크만(Alexander Ekman)은 2022년, 북유럽을 대표하는 최고 무용단인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GöteborgsOperans Danskompani)와 함께, 비대해진 ‘에고’와 가식적인 이미지에 갇힌 ‘자아’를 깨뜨려 새롭게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 '해머(Hammer)'를 선보였다.

최근 LG아트센터 서울의 ‘CoMPAS 25 시즌’의 마지막 작품으로 내한한 에크만의 '해머'는 부산에서도 공연을 선보이며, 한국 관객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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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객이 ‘마법’처럼 무대에 몰입해 하나가 되는 순간의 ‘현존’을 ‘엔터테인먼트’라고 정의하는 에크만은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삶의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릴 때 선반에 커튼과 줄을 매달아 작은 극장을 만들고 다양한 음악을 배경에 틀어놓고 “나만의 놀이공원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에크만은, 관객을 즐겁게 하면서도 예술적이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삶의 거울”이 되기를 추구한다.

LG아트센터 서울 공연 당시 '관객과의 대화'에서, 에크만은 일상생활에서 받은 영감을 무대화하는 창작 방식에 관한 질문에,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특정 순간들을 확장하고 과장해 표현함으로써, 작품이 ‘현재’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를, 일종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해머'는 에크만이 그리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핸드폰을 꺼내 팔을 길게 뻗고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찍느라 여러 포즈를 취하는 젊은 관광객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장난치며 웃고 있지만, 온통 카메라에 어떻게 찍힐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모습에서, 그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현재의 세상과 개인주의, 이기심과 이타심, 자아에 관한 질문을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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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북에 따르면, HBO 다큐멘터리를 통해 SNS에 “팔로워가 백만 명 이상인 계정이 4천만 개, 십만 명 이상인 계정이 1억 개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크만은, ‘나’만을 외치도록 설계된 구조 속에서 무엇을 ‘진짜’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를 무대에 반영했다.

연기하듯 세상을 살아가는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식과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는 에크만의 성찰은, 무대 위에 주황색의 커다란 ‘망치(해머, hammer)’를 비상용 도구처럼 매달아 놓고 사람들의 비대해진 ‘에고’가 부딪히는 전쟁터의 혼란을, 망치를 사용해 멈추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 구현되었다.

'해머'는 이타심과 협업을 강조하듯 모두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그룹으로 함께하는 세상에서 출발해, 자율성과 개성, 자기표현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의 유대와 조화를 ‘이상’으로 강조한 히피 시대를 거쳐, 카메라와 이미지, 시선 집중과 조회수, 팔로워에 노예가 되어 가는 현란한 시대로 이동한다.

에크만은 ‘이타심(altruism)’과 ‘이기심(egoism)’의 두 가지 개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1막의 끝부분에, 객석의 팔걸이 부분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무대에서 객석으로 침범하는 무용수들을 배치했다.

객석으로 점점 더 나아가던 무용수들은 가만히 일어나 조용히 같은 선율을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관객들 역시 그 선율을 함께 따라 부른다. 모두가 하나가 된 느낌에 박수가 터져 나오고 무용수와 관객들은 서로 웃으며 환호한다. 하지만,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자신들을 찍으라는 무용수들의 요청이 시작되면서 모두가 온통 카메라에 집중하는 ‘전환’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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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대로 돌아간 무용수들은 암흑 속에 플래시만 번쩍이는 가운데 각자 자신의 사진 찍기를 무한 반복한다. 밝은 배경의 1막과 달리 2막은 암흑과 어둠, 카메라와 거울, 조명을 강조한다.

셀카를 찍듯 더 예쁘게, 더 멋있게, 더 강하게 과장된 포즈와 동작을 반복하는 무용수들은 각자 큐브처럼 생긴 자신의 거울을 보느라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깃털을 과시하는 공작새처럼 높은 굽의 신발을 신은 양 다리를 넓게 펼쳐 허영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보다 주목받기 위해 서로를 세게 밀치며 앞으로 나아가며, 전갈처럼 다리 한쪽을 들고 위협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현재의 세상을 반영한다.

서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면서 입 닥치고 내 말만 들으라고 아우성으로 각자 소리치던 이들은 마녀사냥처럼 다수가 하나를 공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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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과장되게 꾸미고 보정용 속옷을 몇 개씩 껴입으며, 성적인 자극과 거짓된 웃음, 상품 광고와 홍보, 번듯해 보이는 피상적인 글귀와 유행하는 제스처에 집착하는 라이브 방송이 펼쳐지는 무대는, 점점 더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만의 자아를 세우듯 높게 쌓은 벽돌들을 끌어안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 안쓰럽기만 하다.

‘나’에 대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혼자 중얼거리면서 경쟁적으로 벽돌을 세우고, 붙들고 집착하고, 결국 기울어져 무너지기를 반복하던 이들은, 이제 다른 이가 세워놓은 벽돌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비트가 빨라지는 가운데 광란으로 치닫는 아귀다툼은 한 사람이 달려가 해머(망치)를 꺼내 ‘징’을 울리고 나서야 모두 쓰러져 침묵 속에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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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만은 침묵 속에 일어선 무용수들이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흩어져 버린 벽돌들을 함께 치우는 모습을 거쳐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동체로서 일관된 동작을 하며 함께 움직이는 이들 앞에 고양이 인형을 머리에 쓴 사람이 나타난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막이 내리는 '해머'의 질문은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개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이다.

어렵게 되찾은 이타심을 간직한 채 균형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개념에 몰두해 또 한 번의 혼란을 되풀이할 것인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고 또 한 번의 ‘해머’를 필요로 하게 될 개념, 혹은 기술은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