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허연 시인의 ‘어떤 거리’

2025-12-04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어떤 거리 / 허연​

서쪽으로 더 가면
한때 직박구리가 집을 지었던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7년째 죽어 있는데
7년째 그늘을 만든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는 거리와 닮았으니까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보통은 별이 떠야 알 수 있지만
강 하구에 찍힌
어제 떠난 철새의 발자국이

그걸 알려줄 때도 있다
마을도 돌고 있는 것이다

차에 시동을 끄고 자판기 앞에 서면
살고 싶어진다
뷰포인트 같은 게 없어서
나는 이 거리에서 흐뭇해지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다

단팥빵을 잘 만드는 빵집과
소보로를 잘 만드는 빵집은 싸우지 않는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커다란 진자의 반경 안에 있는 듯한
안도감을 주는 거리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 지성사, 2020)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와 문화선임기자, 매경출판 대표를 거치며 문학과 저널리즘 두 세계를 오가며 도시의 결을 세심하게 관찰해 왔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시가 지닌 차가운 명료함과 내면적 떨림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표면 아래 숨은 고독과 미세한 감정의 흔적을 포착하는 능력은 그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절제된 언어 속에서도 존재의 진실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대표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작약과 공터’는 삶의 균열과 도시적 정서를 투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후 동시집 ‘내가 고생이 많네’와 시선집 ‘천국은 있다’, ‘밤에 생긴 상처’를 통해 시적 스펙트럼을 넓히며 다양한 독자층과 소통해 왔습니다.

그의 꾸준한 창작과 사유는 한국출판학술상, 한국출판평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 김종철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다수의 수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도 허연 시인은 창작과 비평, 강연, 문학상 심사, 출판 업무를 병행하며 도시의 그늘과 인간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절제된 언어 속에 깊은 내면을 담아내면서 한국 시단에서 귀한 목소리로 빛을 더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