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 사람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 外
- [비평연대] 윤인혁·김성신·최여정·설명문·강민지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알렉상드르 타로 지음, 백선희 옮김, 풍월당, 2019)
공연장을 즐겨 찾거나, 비록 현장에 있진 못하더라도 공연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어느 연주자나 배우의 팬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질 테다. 무대 뒤나 무대 위에서, 혹은 공연장에 오는 길을, 일상의 이야기들을.
알렉상드르 타로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구석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대와 일상에 관한 이야기도 물론 재미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예술가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즐거움과 슬픔, 젊었을 적 겪은 모욕, 삶의 비극과 희망. 단지 다르다면 그는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대부분의 경험과 감정이 쌓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타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술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환경에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아흔이 넘는 세월 동안 공연장을 찾아오다가 어느 날 음악을 듣다 그곳에서 편안히 눈을 감은 나폴리의 할머니. 예술 가까이 살았고, 예술 속에서 죽은 나폴리 할머니의 인생이 문득 질투심이 나기도 했다.
공연기획자이자 연출가, 옛 연주자로서 타로의 이야기는 단순한 에세이 이상이다. 어떻게 예술가가 자라나고 키워지는가, 그리고 그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예술을 나누어 주는가에 대한, 예술과 사회의 상관성을 조심스럽게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뒤의 시시껄렁한 이야기, 예술가의 사생활 넘어 예술가의 탄생과 삶이라는 이면을 독자들이 살며시 막을 올리고 들여다보길 기대한다.(윤인혁 / 문화예술평론가·공연기획자·비평연대)
■ 언젠가 전혀 이렇지 않을 것이다 - 다중 차별 넘어 서로를 연결하기(김효진 외 18인 지음, 사슴뿔, 2025)
장애인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다. 보편의 기준을 다시 써야 할 만큼 깊고 크고 빛나는 존재다. 소외되어야 할 목소리가 아니라, 중심을 다시 설계하게 만드는 목소리다.” 공저자인 장은미 작가의 말이다. 소수자와 약자를 우린 습관적으로 붙여 쓰지만, 소수자가 곧 약자는 아니다. 강인한 소수는 생태계 안에서 변이를 일으켜 진화를 이끌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으로 변화에 적응함으로써 종의 멸망을 막는다.
이런 소수가 약자일 리는 없다. “언젠가 전혀 이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시대의 상징 문장이 될 만하다. 존재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적응이 아니라 저항이 인간 존엄의 방식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퇴행의 시대, 도태되는 정신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김성신 / 출판평론가·비평연대)'
■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정명원 지음, 한겨례, 2025)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에스콰이어’를 무척 흥미롭게 봤다. 중세 시대 기사를 보좌하던 젊은 귀족을 의미했던 ‘에스콰이어’는 현재 미국 로펌 소속 변호사들을 부르는 말이다. 제목처럼 작품은 법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의 감동은 매회 일어나는 다양한 소송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재판정엔 앉아 있는 피고인, 원고인, 또 변호사, 검사, 판사까지 이 모든 이들은 서로 다른 역할과 책임으로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데 있다. 재판정은 단 몇 줄로 정의되는 법률을 넘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옳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은 검사가 쓴 재판정의 이야기다. 변호사가 ‘변호’를 해주는 사람이라면 검사는 애초부터 잘못을 들춰내 입증하고 구형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살면서 만나면 안 되는 사람으로 검사를 꼽을 만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검사 세계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정명원이라는 검사가 궁금해졌다. 탑을 쌓을 정도 높이의 법전을 공부하면서도 문학책을 놓지 않았지만, 법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세상은 책으로 배운 지식을 한낱 모래알로 만들 만큼 망망대해 같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형사법의 세계에서 인간은 대체로 유죄이고, 가끔씩 무죄지만, 그런 뻔한 것들로 세상이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죄와 무죄의 틈바구니를 애써 버티는 힘으로 사람의 역사는 쓰인다. 그러므로 검사로 일하며 내가 매일 마주한 것은 시커먼 악의 얼굴도 청명한 정의의 얼굴도 아니다. 다만 애쓰고 있는 평범한 이들의 얼굴이다.“
그러니 유무죄로 나뉘는 법정에서도 사람이 우선이고, 사랑이 필요한 이유다.(최여정 / 작가·문화평론가·비평연대)
■ 온 더 로드(사시데 가즈마사 지음, 박우현 옮김, 이숲, 2025)
이중거점 생활자인 저자는 도쿄와 고베에 거점을 두고, 간토와 간사이를 오간다. 두 개의 거점을 오가며 소설과 지역을 오버랩한 일, 낚시하기 좋았던 곳, 생각하게 만든 영화, 맛있었던 지역의 라멘집. 작은 사건과 생각들을 마치 굴비 꿰어놓듯 한 장씩 쌓았다. 저자가 추천한 라멘집, 그리고 주고쿠 산지의 낚시하기 좋은 곳이 대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에 지도를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 글 몇 줄과 화면의 지도를 오갔는데 향수 같은 것이 생겼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에 강북을 간다. 별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그냥 가서 걷다가 먹다가 온다. 저자는 이걸 ‘흔들림’이라고 했다. 혜화, 서촌, 성북, 북촌과 종로, 그리고 부암동 일대를 생각하는 것으로도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이 기분 좋은 주파수는 분명 미시 세계에서 왔다. 제도와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온 더 로드’. 일기와도 같은 저자의 ‘작은 것’들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애타게 찾아 헤맨 것들이 다름 아닌 ‘길 위’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책을 덮으며 중용 23장의 구절이 떠올랐다. 겁먹은 사회는 수치와 규범으로 세계를 재단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역시 작은 것이다.(설명문 / 건축 및 공간디자이너·문화평론가·비평연대)
■ 사람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정재민 지음, 페이지2북스, 2025)
- 사람과 일의 기준을 다시 묻는 책
정재민 작가의 ‘사람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는 사람과 일에 대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작가는 변호사로서 매번 새로운 인연과 사건을 마주하면서, 누구를 돕고 어떤 일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세운다. “이 사람을 위해 끝까지 변론할 수 있는가”, “정말로 억울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일을 맡는 태도는, 그동안 일이 들어오면 자연스레 모두 받아들이던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일에도 사람에도 기준을 세우는 일이 나를 지키는 첫걸음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책의 핵심 질문인 “사람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를 함께 되새겨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보다 필요한 지점에서 적절한 거리를 둘 용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믿음의 크기가 곧 나 자신을 해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내는 감정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또한 박리다매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구조의 한계를 짚는다. 한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여러 일을 동시에 쏟아내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적은 일을 더 깊이 관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1인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해온 나에게 큰 울림이었다. 일을 줄이는 것이 곧 책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지키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사람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는 변호사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과 일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스스로의 기준 없이 관계와 업무에 지쳐 있는 사람, 일의 방식을 재정비하고 싶은 1인 창업자와 프리랜서, 신뢰와 거리감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