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허형만 시인의 ‘만났다’

2025-11-25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만났다 / 허형만

숲길을 거닐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참나무
나를 위해 기도하는 멧새
나를 위해 기도하는 풀잎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를 만났다.

오늘은 평생을 나와 함께 걸었던 
그의 연약한 뒷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를 살포시 껴안아 주고는 
십자가 앞에 꿇어앉은 그를 일으켜 세워

나의 식탁으로 모시고 
보림사 큰스님이 손수 덖어 보낸 
우전차를 그에게 대접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낯설지 않은 듯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너무도 멀고 너무도 가까웠던
나와 그는
참으로 오랜 시간 숲길에서 
서로를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 '만났다' (황금알, 2022)

허형만 시인은 1945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973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반세기 넘게 한국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국립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인문과학연구원장을 역임하며 지역 문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동안 약 20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주요 시집으로는 ‘청명’, ‘모기장을 걷는다’, ‘공초(供草)’, ‘눈먼 사랑’, ‘그늘이라는 말’, ‘뒷굽’, ‘있으라 하신 자리에’, ‘만났다’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일상과 자연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와 절제된 언어를 통해 인간 내면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소리꾼 장사익이 노래한 ‘아버지’와 ‘파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녹을 닦으며’, ‘광화문 글판 Top Ten’에 선정된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그의 대표작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계간 ‘서정과 상상’ 편집고문, ‘월간 시인’과 이어도문학상 심사위원장을 맡아 신진 시인 발굴에도 힘썼으며, 소파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습니다. 허형만 시인은 현재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는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