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사랑의 양면성과 가혹한 현실, 희망...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LG아트센터 서울 개관 25주년 기념, 피나 바우쉬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대표작 재공연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일반적으로 ‘사랑’은 아름다운 단어이다. 하지만 정말 아름답기만 할까?
사랑은 감정과 관련이 있고, 감정은 상승과 하강의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린다. 사랑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흥분과 좌절, 환희와 상처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때론 상당히 억압적이고, 집착적이며, 폭력적이다.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도 만족보다는 갈증을, 혹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인한 부족을 느끼게 만드는 사랑은 행복감을 주는 만큼 좌절과 실망, 불만의 감정을 제공한다.
최근 LG아트센터 서울(마곡)에서는 ‘현대무용의 혁명가’로 불리는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를 대표하는 1982년 초연작 '카네이션(Nelken)'의 재공연의 막이 내렸다.
LG아트센터 개관 25주년을 맞아 다시 한국 무대에 오르게 된 '카네이션'은 2000년에 LG아트센터가 역삼동에 문을 열 당시 개관작으로 바우쉬가 직접 추천해 준 작품이다.
25년 만에 한국 관객들과 다시 만나게 된 '카네이션'은, 2009년에 바우쉬가 암 선고를 받고 5일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수장을 잃게 된 ‘부퍼탈 탄츠테아터(Tanztheater Wuppertal)’가 바우쉬의 유산을 보존하려는 노력과 시도 속에, 젊은 무용수들로 대부분 세대교체를 이룬 특징이 있다.
'카네이션'은 바우쉬가 1980년에 칠레 안데스산맥을 지나면서 마주한 카네이션이 가득 핀 꽃밭과 셰퍼드 개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바우쉬는 1995년 에든버러 기자 간담회에서, 들판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꽃들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주변에 경비견을 배치해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화려한 꽃들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개들이 공존하는 모습”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음을 강조했다.
분홍색 카네이션 꽃과 셰퍼드의 “대립”의 이미지는 카네이션이 상징하는 ‘사랑’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으며, 바우쉬는 무용수들에게 사랑과 관련된 많은 질문을 던졌다.
‘언제 처음 사랑을 느꼈는가’에서 출발한 질문은 ‘진정한 친구를 찾았다고 느낀 순간’과 ‘춤을 사랑하게 된 이유’, ‘첫 무대의 기억’ 등으로 확장되었고, 바우쉬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도록 무용수들의 이야기들을 선별해 작품을 구성했다.
바우쉬에 따르면, '카네이션'은 “젊음과 소망, 꿈, 욕망, 그리고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가혹한 현실의 대립”을 강조한 작품이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과 제복을 입은 경비원에게 이끌려 각 모퉁이에 서 있는 네 마리의 셰퍼드는 ‘대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파티에 참석하듯 긴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무용수들이 의자를 조심스레 들고 와 무대에 가득 피어 있는 카네이션 사이로 자리를 잡고 앉는 우아한 첫 장면은 마지막까지 유지되지 않는다.
짧은 에피소드의 수많은 장면을 거쳐 마지막에 이를 즈음이면, 무대 위에 줄기까지 곧게 세워져 활짝 피어 있던 9천 송이의 카네이션은 무용수들의 몸과 발에 찢기고 밟히고 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흩어지게 된다.
순수한 시절에 품은 소망과 꿈, 욕망이 현실의 냉혹함과 가혹함 속에서 두려움과 분노, 좌절, 실망을 마주하고, 슬픔과 상처의 과정을 딛고 일어서 성숙에 이르는 것처럼, 봄은 뜨거운 여름을 불러오고, 서늘한 가을과 혹독한 겨울을 거쳐 또다시 꽃을 피우는 봄으로 이어진다.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른 조지 거슈윈 작곡의 노래 '내가 사랑한 남자'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무용수가 홀로 서서 ‘수어(手語)’로 가사를 전달하는 무대는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낭만적인 소망과 희망을 제시한다.
하지만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D.810)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혼란스러운 무대는, 젊음 속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유혹과 저항, 불안과 두려움, 궁극적인 수용이라는 음악의 주제에 맞춰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한 ‘대립’을 펼쳐 보인다.
또,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의 재즈 트럼펫 선율에 맞춰 몇 가지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표현하는 춤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강조한다.
197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뮤지컬 '코러스 라인'에서, 댄서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안무를 똑같이 하는 스펙터클에 빗대어 ‘넬켄 라인(Nelken Line)’으로 불리는 이 장면은, 관객이 함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이 알려주는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역경을 통해 성장하고, 시련을 딛고 행복으로 향하는 힘을 말하는 ‘회복탄력성’은 사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는 안무 동작과 함께 짓밟히고 쓰러진 꽃밭이라도 또다시 새로운 탄생이 다가올 ‘봄’을 기대할 수 있고, 배제와 억압, 차별, 감시의 명령에 무너져 내린 시간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긍정한다.
“무용이 진정한 연극의 한 형태임을 입증했다”라는 평가를 받는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춤과 마임, 음악, 무대디자인, 소품, 연극적 요소가 하나로 결합된 혁신적 측면으로 인해 작품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을 겪기도 했다.
선형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파편처럼 따로 떨어진 듯 보이는 짧은 장면들은 ‘춤’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무용수들은 배우, 내레이터, 곡예사, 광대, 스턴트맨의 역할까지 소화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집중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익히는 모든 ‘움직임(movement)’이 춤이고, 모든 움직임은 ‘감정’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몸’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것, 그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카네이션'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감정의 고조와 저조가 대비되는 양가적이고 양면적인 모습들이 강조된다.
배제와 포용을 결정하는 사랑이 품은 긴장과 공포, 히스테리로 치닫는 불안의 증폭, 누군가의 기준 혹은 기대에 맞춰 자신을 바꿔야만 하는 강압적인 요구에 대한 굴욕적인 복종의 순간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분홍빛 카네이션의 세상이 품은 폭력성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에 관한 작품이라고 설명되는 '카네이션'은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관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권력과 규율 속에서 느끼는 강렬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기괴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동시에 서정적인 향수와 유머가 공존하는 작품은 삶의 순간들이 표류하듯 지나가는 가운데 관객이 특정 ‘감정’을 느끼며 무대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2009년 무용 평론가인 이즈메네 브라운과의 인터뷰에서, 바우쉬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혼자 놀면서 손님들을 ‘관객’처럼 바라보며 상상했던 경험이 다채로운 순간들을 짧게 구현하는 무대의 근원이 되었음을 설명한다.
“삶이 펼쳐지는 곳”이자 “인생에서 마주하는 온갖 기분”을 모두 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공간은 무대로 옮겨졌고, ‘몸’을 통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녀의 창작 방식은 ‘탄츠테아터’라는 장르로 발전되었다.
바우쉬는 자신의 작품이 세상을 향한 ‘특정 태도’를 구현한 것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초연 후 43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관객 각자에게 나름의 해석과 감정, 이야기를 생산하도록 만드는 '카네이션'은 끊임없이 바우쉬의 ‘유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제는 ‘전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 바우쉬’의 레퍼토리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