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함민복 시인의 ‘부부’

2025-11-06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1994)

함민복 시인은 1962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설설’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그는 데뷔와 함께 ‘삶의 언어’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화려한 수사보다 일상의 체온이 남은 언어로 세상을 기록하며,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우울 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악수’ 등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상처를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서 사람을 믿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절망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존엄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그의 시는 ‘견디는 자의 언어’로 불립니다.

함민복 시인은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시적 성취를 인정받았습니다. 현재 강화도에 머물며 어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삶의 현장 속에서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고요한 인내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온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