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화담, 꽃들의 속삭임 · 부패하지 않는 사랑의 힘 外
- [비평연대] 윤인혁·최여정·설명문·강민지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화담, 꽃들의 속삭임 (문산수억중 편집부, 문산수억중학교, 2024)
작년 어느날, 동네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중학교 교사인 후배는 다짜고짜 출판사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알고 있는 시인 분이 운영하는 1인 출판사를 연결해 줬다. 그로부터 거의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이 책을 건네받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정말이지 진부한 표현이지만, 책을 처음 받아 중학생들이 쓴 시를 읽자마자 느꼈던 감정이다. 흔히 ‘중2병’이니 질풍노도의 반항아를 머릿속에 그려왔던 나에게 참 귀여운 문장들이 펼쳐졌다.
학생들은 아마 시와 산문을 쓰면서 주변을 되돌아봤을 것이다. 아니, 되돌아보고 관찰하고, 애정을 갖고, 즐거워한 모습이 읽혔다. 때로는 우정이 담겨 있고, 때로는 사랑이 담겨 있고, 때로는 일상과 주변이 담긴 시를 본다. 어른처럼 염세적으로, 또는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 깨끗한 렌즈 속에 담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천진한가.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쓴 거칠고 일상적이며 순진한 시를 읽으니, 한편으로 안심이 되는 건 왜일까. 이 아이들도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고, 돈을 많이 벌길 바라는 마음은 또래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이 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저 아이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읽고,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질 뿐이다.
녹음(綠陰, 최은규 作)
푸르른 녹음 산림
강렬한 햇살
산들산들 아침 바람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소중하여
(윤인혁 / 문화예술평론가·공연기획자·비평연대)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갈라파고스, 2025)
이 흥미진진한 제목의 책은 소설이 아니다.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가 쓴 인류학 보고서다. 청킹맨션. 복잡한 침사추이 한복판에 우뚝선 이 건물 앞에서 목을 빼고 올려다 본 기억이 내게 남아있다. 영화 '중경삼림'의 촬영지, 홍콩의 다문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주머니 가벼운 전 세계의 배낭여행객에게 간신히 누울 만한 침대 하나 내어주는 곳으로 알려진 청킹맨션에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청킹맨션의 보스의 이름은 카라마. 탄자니아 출신의 난민인 그는 중고 자동차 중개업자이자 청킹맨션에서 탄자니아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한다. 둥글둥글한 외모의 카라마는 언뜻 보기에 게으르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대책없는 낙천적 인간처럼 보이지만 신뢰와 불신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느슨한 협동과 호혜를 이끌어낸다.
모이면 혐오하거나, 흩어져서 고립되어가는 지금, 강력하고도 비합리적인 연대가 필요한 지금,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라는 한 인물을 통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 어느때보다 강력하다. 무엇보다 책을 덮고 나면 ‘그리스인 조르바’ 보다 더 매력적인 카라마를, 그리고 이토록 독창적인 문화인류학서를 써낸 저자 오가와 사야키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진다.(최여정 / 작가·문화평론가·비평연대)
■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나날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 지음, 주명철 옮김, 여문책, 2025)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나날'은 한 인간에게 끼얹어진 오물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것 너머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광기는 그것을 행하는 개개인과는 무관한 의도를 갖는다. 광기를 행하는 주체는 곧 광기의 숙주다. 개인은 지혜로울 수 있으나, 대중은 선수를 빼앗긴다. 그리고 그 광기는 공교롭게도 항상 누군가의 적을 죽인다. '빅사이클'에서 레이 달라오가 말했던 사이클은 항상 이런 형태로 반복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232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빵과 케이크’ 일화를 통해 끊임없이 모욕되고 처형된다. 이 손쉬운 처형은 누가 무엇을 위해 기획했을까. 이성은 광기의 핑계에 불과할 뿐일까. 1793년의 콩코드 광장은 이제 없다. 다만 모두의 손안에 간편한 단두대가 주어졌다. 누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될 수 있다. 머리가 떨어져야 지속될 수 있는 사회라면, 내가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판결의 주체가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는 일이다.
책을 덮으며 쳇바퀴에서 벗어난 인간 사회에 대해 상상했다.(설명문 / 건축 및 공간디자이너·문화평론가·비평연대)
■ 부패하지 않는 사랑의 힘 (나호선 지음, 여문책, 2025)
- 친근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사랑의 회복력
작가 나호선의 '부패하지 않는 사랑의 힘'은 특별하지 않은 하루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사랑의 힘과 회복력을 섬세하게 그려낸 책이다. 화려하거나 거대한 사건 대신, 지극히 현실적인 관계와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나 자신의 기억이 어느순간들이 떠오른다. “나도 저런 감정을 느꼈었지” 하고 떠올리게 되고, 어느새 숨기고 싶던 나의 내면의 기억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된다. 작가의 솔직한 시선은 그 부끄러움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내면을 보며 그 시절의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따듯한 위로가 된다.
특히 작가가 겪었던 병의 시간이 단순히 아픔의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배려의 기억으로 남는 다는 것이 인상적이였다. 육체적 고통을 겪어봤기에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의 손길을 내미는 사랑의 마음이 자라난다는 것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작고 반복되는 이해의 행위들이라 생각했다.
'부패하지 않는 사랑의 힘'은 삶의 평범한 순간들 속에 깃든 사랑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다. 거창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심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사랑이란 누군가에서 주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 매일 갱신해 나가는 마음의 면허임을 깨닫게 해준다.(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