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나희덕 시인의 ‘배추의 마음’

2025-10-30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 비평사, 1994)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며 등단했습니다. 그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존재와 관계의 깊은 사유를 중심에 두며 생명에 대한 윤리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뿌리에게’,‘그 말이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시와 물질’ 등이 있습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학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며 시 창작과 문학 교육에 힘쓰고 있으며, 오랜 기간 후학들에게 언어의 깊이와 시적 사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 세계는 절제된 언어 속에서 생명의 연대와 치유의 가치를 포착하며 ‘존재의 생태학’, ‘조용한 혁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영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시의 중심적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섬세한 사유와 따뜻한 언어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의 가능성을 시로 묻는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