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예술이 현실에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연극 ‘프리마 파시’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 - 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의 웨스트엔드(2022), 브로드웨이(2023) 화제작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우리는 흔히 법이 ‘정의(justice)’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법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실질적인 책임과 처벌을 의미하는 평등한 정의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규칙이자 체계인 법은 많은 불공정을 딛고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마련된 도구일 뿐이다.
공정함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긴 하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 각자의 정의를 모두 실현해 주지는 못하는, 불완전하고 허점이 많은 법은, 수많은 소송 사건이 쌓이고 부당함이 제기되어야만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변호사로 15년간 일하다가 2010년부터 극작에 전념해 온 호주 출신의 작가 수지 밀러(Suzie Miller)의 1인극 '프리마 파시(Prima Facie)'가 2019년, 시드니 그리핀 시어터에서 초연되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022년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작품은 2023년 브로드웨이에서도 큰 주목을 받으며, 2023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 최우수 신작상과 여우주연상, 제76회 토니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극 '프리마 파시'는 현재까지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만 한 해에 20개 이상의 프로덕션이 무대에 오를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 영국 국립극장 라이브(NT Live) 상영작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 '프리마 파시'가 무엇보다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연극이라는 예술이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고위직 여성 판사는 연극 '프리마 파시'를 본 뒤, 성폭력 사건에서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낭독하는 지침을 수정했다. 연극 속 대사이자 제목을 그대로 인용해 “Prima Facie direction(프리마 파시 디렉션, 표면적 증거 지침)”이라고 명명한 변경은 성폭력 피해자가 완벽하게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짓으로 볼 수 없다는 점과 피해자가 세부 사항을 잘못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을 배심원들이 인지하도록 지시했다.
북아일랜드의 또 다른 여성 판사는 연극을 본 후, 프로토콜을 수정해 판사들이 반드시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NT Live '프리마 파시' 영상을 시청하도록 했다. 또, 젊은 여성 변호사들은 연극 속 주인공에 대한 오마주로 ‘테사(TESSA)’라는 이름의 중대 성폭력 조사 단체를 구성했다.
밀러는 영국의 시사주간지 '뉴 스테이츠먼'과의 인터뷰에서, 법학 학위와 석사까지 마치고 15년간 변호사로 일하면서도 바꾸지 못한 부분을, 연극 속 주인공 ‘테사’의 입을 빌려 5분간 쏟아낸 대사를 통해 바꿀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말한다.
노동자 계층 출신이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경주마들의 경쟁과 다름없는 케임브리지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테사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형사법 법정 변호사로 ‘최고 중의 최고’가 되기 위해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케임브리지 법대 졸업생 중 오직 10명만이 법정 변호사가 될 수 있고, 그중 5명만이 왕실 변호사직을 가질 수 있으며, 10년 주기로 단 한 명 만이 판사직에 오를 수 있는 법조계에서, 테사는 왕실 변호사 자리를 제안받는다.
오직 “법적 진실(legal truth)”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변호사로서, 법 시스템 속에서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를 충실히 대변하는 테사는 ‘훌륭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강조한다. 테사는 유죄를 밝히고 책임을 지우는 것은 검사와 배심원, 판사의 몫일 뿐,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최상의 버전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사건 증거의 허점을 찾거나 반대 심문을 통해 증언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테사는 성폭력 사건의 경우,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말과 상반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가해자(피고인) 변호사가 의뢰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걸 가해자가 몰랐다는 점만 밝히면 된다고 말하는 테사는, 피고인 변호사로서 피해자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질문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어느 날 밤, 테사는 동료 변호사인 줄리언과 데이트를 하고 술에 잔뜩 취해 함께 집으로 돌아와 거부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관계를 맺는 성폭력을 당한다. 피해자로서 혼란에 휩싸인 테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법적 지식이 성폭력을 당한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당혹감, 자책, 수치심, 의문, 불안, 공포, 알 수 없는 죄의식까지, 테사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는 혼돈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782일간의 법정 다툼에 나선다.
극작가 밀러가 테사의 처절한 법정 싸움을 통해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폭력법이 완전히 잘못된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라는 점이다. 유엔(UN)의 통계에 따르면, 여성 3명 중 1명이 성폭력을 경험한다.
밀러는 “영국의 경우,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 10명 중 1명만이 경찰에 신고하며, 그중 극소수만이 법정 소송에 나선다”고 덧붙인다. 또, “법정 소송 사건 중 가해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는 오직 1.3%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밀러가 인권 변호사로서 피해자들의 진술을 기록하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피해 여성들 모두가 얼어붙거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반응들은 모두 “정당한 생존 본능”이지만, 법정에서 가해자(피고인) 변호인들은 오히려 이점을 이용해 피해 여성의 증언을 훼손하고 충분히 방어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밀러는 도망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자가 암묵적 동의를 했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피해자가 도망칠 수 없거나 싸울 수 없는 위협의 상황을 인식했을 때 본능적인 공포로 인해 얼어붙을 수 있음을 토로한다.
긴 법적 다툼에서 만신창이가 된 테사는 “법정 변호사로서 법이 일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성폭력 재판에서만큼은 일관성을 진술 신뢰도의 시금석으로 삼을 수 없음”을 토로한다.
테사는 언젠가 자신이 반대 심문을 진행했던 재판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다른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에 서 있다”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3명 중 1명일지 모를 여성들을 위해, 자신이 믿어온 법이 전혀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딛고 침묵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테사는, “어디에서,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점을 관객에게 피력한다.
밀러가 1980년대 법대 시절부터 품어온 부당함에 대한 인식과 변화의 필요성은 2022년이 되어서야, 변호사가 아닌 극작가로서 창조한 인물을 통해 현실로 구현된다.
이제 남겨진 질문은 하나이다. 연극 '프리마 파시'가 우리 법체계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누군가로 인해, 우리 또한 어떤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해답은 관객만이 갖고 있지 않을까?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