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오세영 시인의 ‘아아 훈민정음’

2025-10-09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아, 훈민정음 / 오세영

언어는 원래 신령스러워
언어가 아니고선 신(神)을 부를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영원(永遠)을 알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생명을 감동시킬 수 없나니
태초에 이 세상은
말씀으로 지으심을 입었다 하나니라.
그러나 이 땅, 그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서 과연 
그 어떤 것이 신(神)의 부름을 입었을 손가.
마땅히 그는 한국어일지니
동방에서 
이 
세상 최초로 뜨는 해와 지는 해의
그 음양(陰陽)의 도(道)가 한가지로 어울렸기 때문이니라
아, 한국어
그대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그대가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었도다.
그래서 어여쁜 그 후손들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이치를 터득해
'·', 'ㅡ', 'ㅣ' 세 글자로 모음 11자를 만들었고

천지조화(天地造化), 오행운수(五行運數), 그 성과 정(性情)을 깨우쳐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
5종의 자음, 17자를 만들었나니
이 세상 어느 글자가 있어
이처럼 신과 내통(內通)할 수 있으리.
어질고 밝으신 대왕 세종(世宗)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정음(正音) 28자로
개 짖는 소리, 천둥소리, 심지어는 귀신이 우는 
울음소리까지도 
적을 수 있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좌우상하(左右上下)를 마음대로 배열하여
천지간 막힘이 없고
자모(子母)를 결합시켜 매 음절 하나하나로 
우주를 만드는
아아, 우리의 훈민정음.
속인들은 이를 
이 세상 어느 글자보다도 더 과학적이라고 하나
어찌 그것이 과학에만 머무를 손가.
그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는
아아, 신령스러운 우리
한국어,
우리의 훈민정음.

- '갈필의 서' (서정시학, 2022)

오세영 시인은 전라남도 영광 출신으로, 1968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무명 연시’, ‘밤하늘의 바둑판’, ‘갈필의 서’, ‘시사백 사무사’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 ‘아아, 훈민정음’은 한글날과 세종대왕 탄생일, 스승의 날, 시의 날 등 기념일마다 전국에서 낭송될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시인협회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로서 강연과 저술을 통해 시 세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