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서 다시 쓰는 기사…민박집으로 이어간 기자의 삶
- 임용진 전 중앙일보 기자 ‘제2 전성기’…전세계 젊은 배낭족 발길 줄이어 - “기자는 본질적으로 정의의 직업…정의 잃으면 펜 든 행인일 뿐” - “持己秋霜, 待人春風(지기추상, 대인춘풍)…자신에게는 서리처럼,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 펜의 힘에 취하지 말고, 글 속에 사람의 체온을 담으라는 당부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 = 가을비 내리는 어느날 저녁, 전주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면 뜻밖의 ‘신문사’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한다. 그런데 여기엔 활자가 아니라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지면 대신 낯선 여행자들의 얼굴이 가득하고, 기사 대신 각국 청년들의 사연이 이어진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임용진, 70대에 접어든 전직 중앙일보 기자다. 그는 지금, ‘Nearest’라는 이름의 민박집(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인생 2막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은퇴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기자의 눈
기자는 상대의 말을 듣고, 문맥을 읽고, 숨은 이야기를 포착하는 직업이다. 그 습관은 은퇴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민박집이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더 빛을 발한다.
프랑스에서 온 배낭족이든, 남미에서 건너온 청년이든, 그는 첫눈에 그들의 필요를 읽어낸다. 마치 마감 직전의 기자가 취재원에게서 핵심 문장을 뽑아내듯, 여행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짚는다. 언어의 벽은 기자 특유의 직관으로 넘어선다.
그의 집 거실은 어느새 국제회의장이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묻는 학생, 비무장지대(DMZ)를 궁금해 하는 청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토론하는 대학생들. 이 작은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는 국경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임용진 씨는 여기서 기자 시절의 ‘독해력’을 다시 꺼낸다. 그는 단순히 침대를 제공하는 민박 주인장이 아니라, 세계를 이어주는 편집자다.
한국 문화 번역하는 또 다른 기사
민박집은 단순한 숙소가 아니다. 북을 치며 국악을 설명할 때, 전통주를 함께 나누며 건배할 때, 그는 기자 시절처럼 ‘한국’을 세계에 보도한다. 기사가 활자에 머물렀다면, 지금 그의 기사는 경험으로 전파된다. 젊은이들이 ‘Nearest’에서 남기는 기억은 일종의 살아 있는 기사다. 그는 여전히 기자처럼 ‘문화 특파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자주 되뇌는 한 구절이 있다. 持己秋霜, 待人春風(지기추상, 대인춘풍).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라는 뜻이다. 그는 고백한다.
“기자를 하다 보면 펜도 권력이 됩니다. 힘에 취해 남을 추상처럼 재단하고,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는 존재인 양 행동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후회막급이에요.”
그러나 바로 그 회한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로 바뀌었다. 기사는 정의를 좇아야 한다. 정의를 잃으면 기자는 단순히 펜을 든 행인에 불과하다. 글에는 체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숨결이 빠진 활자는 독자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자는 경청하는 직업이다. 민박집에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여전히 기자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인생의 2막, 또 다른 기사
임용진 씨는 더 이상 신문에 글을 싣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하루는 여전히 기사로 채워져 있다. 작은 객실에서, 긴 탁자에서, 보름달이 뜬 마당에서. 세계의 젊은이들과 나누는 대화와 웃음은 인쇄되지 않은 기사, 그러나 더 오래 남는 기사다.
기자는 현장에서 세상을 기록한다. 은퇴한 기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상을 맞이한다. 전주 한옥마을의 작은 민박집 ‘Nearest’에서, 한 전직 언론인은 여전히 정의와 따뜻함을 잃지 않고 인생의 두 번째 기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의 기사 제목은 이렇게 붙여도 좋을 것이다.
“유쾌하고 친절한 주인장(호스트), 그리고 여전히 기자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