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27) 연세대서 윤동주의 나라사랑과 봉원사서 한글사랑을 배우다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가을은 걷기의 계절이다. 살랑살랑 속삭이며 귓불을 스치는 바람을 벗 삼아 길을 나선다. 오늘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연세대를 거쳐 봉원사까지다.
주제는 문학의 향기를 맡으며 역사 생각하기.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 연희전문에 다닐 때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80년이 넘어 그때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두 눈 크게 뜨고 두 귀 쫑긋 기울이며 코와 살갗을 열면 그때의 숨결이 들릴 듯하다.
홍익문고 앞 문학의 거리에서 그대를 느끼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를 나오면 홍익문고가 반갑게 맞이한다. 홍익문고는 1957년에 문을 연 신촌의 대표서점. 서대문구 창천동 18-4의 옛날 그 자리에서 새로운 건물로 거듭 태어나 젊음을 뽐내고 있다.
42년 전, 홍익문고에서 조병화 시인의 시집 '만나는 거와 떠나는 거와'를 샀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미대 조소과 여학생에게 생일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연세대 정문 굴다리 앞 독수리다방에서 “생일 축하해~”라며 쑥스럽게 건네주던 모습이 겹친다.
그때의 사연은 야속한 세월과 함께 옅어졌는데, 홍익문고는 수많은 추억을 가득 담고 옛 자리에서 멋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독수리다방도 8층짜리 독수리빌딩에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새 손님 맞이한다. 시집도, 시집을 받은 사람도 모두 떠나버린 자리에, 시집 준 사람이 문득 가을을 익히러 온 듯한 모양새다. 홍익문고 안으로 들어가 '만나는 거와 떠나는 거와'를 펼쳐 보니 '밤의 이야기 21'에 눈에 띈다.
술이여! 쓸쓸할 때 너는 나를 찾아 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언제나 너를 찾아갈 수 있어 좋다 너는
공산주의도 아니요 자본주의 아니요 아무런 주의도
아니어서 좋다 너는 당적이니 호적이니 등록이니 하는
것이 없어 그저 좋다 아무런 수속이 없어 좋다
너는 그저 너의 자리에 있는 것 백년 천년 몇몇 천년을
그저 너의 자리에 소리 없이 있는 것
가장 이야기가 많으며 가장 없는 것 가장 쓸쓸하지 않으며
가장 쓸쓸한 것 가장 가난하지 않으며 가장 가난한 것
가장 잊어지지 않으며 가장 잊어지는 것
깊은 자리로 깊은 자리로 항상 혼자케 하여 주어 좋다
거처가 없는 자의 벗이여
떠나는 자의 벗이여
내일을 두고 가는 자의 벗이여
스스로 스스로에 취해 스스로를 찾아
스스로를 버리는 아
이 자유여
너는 내 곁에 언제나 있어 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속 없이 따짐 없이 두려움함 없이 너를 내가 찾아갈 수
있어 좋다
- 조병화, '밤의 이야기21' 전문.
오늘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불쑥 고개 들이민 추억을 떨쳐내고 앞으로 걷는다. 그때 문득 그대가 다가왔다. 중절모를 쓰고 책을 펴든 신사가 ‘문학의 거리’임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다. 인도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거리의 피아니스트가 선뜻 타임머신을 돌린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잊었던 옛 추억이 들이미는 건 나이 탓일까, 가을 탓일까.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길이 막히고, 막혔던 길이 뚫렸을 때 문득 그대의 향기가 들렸다는 게 또 하나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으니…
신촌 문학의 거리가 아프다
이제 겨우 열두 살 어린아이인데
한참 파릇파릇 뛰어놀 꿈나무인데
하나 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벗 삼아
초라한 중절모를 쓰고 관심을 구걸한다
결실의 계절에 들어선 가을에
신촌 문학의 거리는 외로움을 하소연한다
- 홍찬선, '신촌 문학의 거리' 전문.
잠깐 추억에 잠겼다가 눈을 뜨니 다시 ‘문학의 거리’를 알려주는 중절모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우리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시대정신과 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신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자 서대문구가 2013년에 조성한 문학의 거리입니다”라는 설명이 함께 따라왔다.
그 옆으로 윤동주 최인호 김남조 이어령 정현종 이근배 김승옥 유안진 조정래 강은교 박범신 정호승 도종환 곽재구 등 15명 작가의 두 손을 새긴 동판이 새겨져 있다. 왜 15명인지, 한용운 이육사 현진건은 왜 빠졌는지, 해마다 작가들을 늘리려 했는데 사정이 바뀌어 중단된 것인지…, 등의 의문은 답을 찾기 어려웠다.
쓸데없는 의문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며 걷는다. ‘명물거리’의 도로 위를 가로질러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연고전에서 연대의 승리를 응원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들을 무심하게 보며 연세대 정문으로 들어선다. 1987년 6월9일, 오후 4시40분경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뒤통수에 맞았던 곳이다. 이한열은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날 오후 5시30분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7월5일 오전 2시5분에 사망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이끌어 낸 ‘6.10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였을까. 정문 앞, 경의선 철교 아래로 난 길 옆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추모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1991년 5월18일,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 투신해 사망한 이정순 열사(1952~1991)를 기리는 추모비다. 추모비 옆면에 유고시 '내 빛은 어느 빛이런가'의 일부가 새겨 있다. 참으로 아픈 시대를 어렵게 견뎌온 나를 되돌아본다.
듣는 이 없어 몇 자 적어본다
꼭 꼭 닫아버린 문
어이해 열릴거나
답답한 캄캄 속
어느 때나 비출거나
별도 빛이련만
해도 빛이련만
등불도 빛이련만
내 빛은 어느 빛이련가
나지막한 소리는
어디서 어느 곳에서
바람결에 들리듯
이렇듯 알리듯 스며
젖어들고
안타까운 가슴은
눈망울에 구슬이 맺히도록
저려오고
일으키는 빛은 어느 곳에서
비추나
- 이정순, '내 빛은 어느 빛이런가' 일부.
연세대 본관 옆 핀슨홀 앞의 윤동주 시비
아픈 역사를 새김질하며 정문에서 백양로를 걷는다. 본관에서 왼쪽으로 돌면 나무 우거진 길 사이로 조그마한 숲을 지나면 핀슨홀이 나온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다닐 때 기숙사였던 곳이다.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이다. 그 앞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문.
윤동주 시비는 1968년 11월2일에 윤동주를 사랑하는 연세대 동문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다행히 우리가 '서시'라고 알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시비 앞에 새기면서 '서시'라고 쓰지 않았다. 윤동주가 '서시'라는 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윤동주는 1941년 11월 20일, 연희전문 졸업기념으로 시집을 출간하려고 자신의 시 18편을 육필로 3부를 만들었다. 원고 맨 앞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제목을 썼다. 그 다음 장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로 시작하는 시를 넣었다.
윤동주가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순국하고 1945년 8월15일 광복된 지 3년 뒤인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면서 편집자가 '목차'에 '서시'라고 표현한 것이 그대로 '서시'로 굳어진 것이다. 윤동주가 2년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던 육필원고가 원본 그대로 남아 있는 만큼 이제라도 윤동주의 '서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4년 전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시비를 보러 연세대에 갔다. 본관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윤동주 시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과 교직원 또는 교수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네댓 명에게 물어봤는데 아무도 몰랐다. 그때 안타까움을 시 '윤동주 시비에서'에 담았다.
하루하루가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말조차 쓰면 잡혀가는
일제강점기에 구차한 삶 살아야 하는
감수성 넘치는 젊은 시인에게
잎새에 이는 바람은
일제수탈에 고통받는 동포의 신음,
그 괴로움을 견디고 견디다
이리 잡으러 늑대 굴에 뛰어들었다가
더럽고 치사하고 잔악스런 승냥이에게
목덜미 잡혀 생체실험이란 국가폭력에
스물아홉 인생을 강탈당했어도
그것 자체는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뺏겼어도
얼은 오롯이 지켜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살아있는 시인에게
괴로움은
별이 스치우는 밤에
주어진 길을 걸어가지 못한 것,
일찍 철든 젊음을 보낸 핀슨관 앞
고즈넉한 숲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윤동주 시비를 뒤늦게 찾은 게으름을,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라서
국문학과에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다는
어린 후배들을 아마도 아파할 것이다
- 홍찬선, '윤동주 시비에서' 전문.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2025년은 윤동주가 순국한 지 80년 되는 해다. 연세대에서도 지난 2월14일 80주년 추모예배가 이뤄졌고, 국내외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지면서 윤동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봉원사로 발길을 옮긴다.
봉원사(奉元寺)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금화터널 쪽으로 가다가 고가 밑에서 왼쪽으로 500m 쯤 올라가면 있다. 88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을 때 반야사(般若寺)라고 했다. 고려말 공민왕 때 보우국사가 중건하고 금화사(金華寺)라고 바꿨다. 구한말에 이동인(李東仁, ?~1881)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을 모의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이 이곳에서 1908년 8월31일, 국문연구회(현 한글학회)를 만든 역사적 장소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명부전(冥府殿) 현판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도와 조선을 세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쓴 친필이다. 예서체(隸書體)로 쓴 글씨에서 삼봉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을 듯하다. 이곳에 있는 동종(銅鐘)은 충남 덕산의 가야사에 있던 동종을 옮겨놓은 것이다.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쓰기 위해 없앤 절이다.
봉원사 입구에는 나이가 500살은 돼 보이는 느티나무가 있다. 밑동부터 5m 이상 위로 곧게 자란 여늬 느티나무와는 달리 이 느티나무는 처음부터 세 줄기로 나뉘어 옆으로 자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땅 기운과 기후 영향이겠지만, 1200년 동안 겪은 여러 풍파(風波)가 아파서 그렇게 자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백 살 넘은 느티나무가
한줄기 우람하게 하늘로 오르지 않고
세 갈래로 나뉘어 땅에 호소하고 있다
정도전의 冥府殿(명부전) 편액과
김정희의 고졸(古拙)한 붓글씨와
예산 가야사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동종과
이동인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갑신정변 모의와
한글학회가 만들어진 곳이라는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책임감인지
도선과 보우의 손때는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찾아볼 수 없는데
연못 속 향나무가 장단 맞추며 염불하고 있다
찻길 아래로 침묵당한 창천(滄川)의
물줄기를 아파하는 듯 옆으로 춤추며
때 맞춰 변해야 산다고 알려주고 있다
- 홍찬선, '봉원사에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