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안도현 시인의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中 37’

2025-09-11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中 37 / 안도현

보풀,
한없이 성가신 솜털,
목덜미나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마찰이 일어나 생기는 보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나는 보풀,
빼꼼 고개 드는 보풀,

기어가는 보풀,
손으로 잡아 뜯으면 안 되는 보풀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보풀,
그뿌리가 있는 보풀,
끝없는 배경이 있는 보풀,
하찮게 여기면 안 되는 보풀,
떨리는 보풀.

-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중에서 79~80p (몰개, 2025)

안도현 시인은 스무 살에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는 늘 가까운 것들에서 출발합니다. 자연과 고향, 노동과 가족, 밥 한 끼의 소박한 정까지 일상 속 풍경을 통해 삶의 본질과 인간다움을 따뜻하게 비추어 왔습니다. 

그동안 ‘너에게 묻는다’, ‘연어’,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간절하게 참 철없이’ 등 열한 권의 시집과 함께 여러 권의 동시, 동화,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1996년에 출간된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많은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해외 15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았습니다. 또한 ‘연탄’, ‘너에게 묻는다’, ‘스며드는 것’, ‘연어’는 세대를 넘어 애송되는 국민의 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석대학교, 단국대학교에서 문학을 꿈꾸는 청춘들과 함께하며 문학과 삶, 교육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김소월문학상, 백석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문단과 대중 모두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고향 경북 예천의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텃밭을 가꾸며, 앞으로 써낼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시를 읽으며 또 다른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출간된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실존 인물의 삶을 시적 언어로 풀어낸 소설입니다. 기존의 예술적 형식을 벗어나 자유롭고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하며,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더 밝고 푸른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시를 통해 연극 대본을 쓴 것처럼, 이 작품 또한 독특한 장르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더욱 생생하게 다가와, 누구나 금세 이야기에 몰입하며 쉽고 재미있게 새로운 독서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