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명동예술극장 빛낸 김정한 연출의 '로제타'
- 무대 49년 고인배 배우, 새롭게 합류한 김성령 배우 중심 역할 - 감동을 자아낸 '로제타', 실력파 연출가의 독창성 돋보여 - 8명의 배우가 모두 로제타 역...다각도에서 인물 조명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과 영국 런던에서 9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보고 귀국한 다음날, 8월 2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김정한(Yossef K.) 작, 연출의 '로제타(Rosetta)'를 관람했다.
인파가 넘치는 명동 번화가, 국립극단의 전용인 명동예술극장에 신선한 레퍼토리가 오르고, 이를 즐기려는 젊은 관객들이 붐비는 광경을 보면서 새삼 공간이 멋지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공동기획이지만 명동예술극장에 중견 연출가의 실험성이 강한 창작극을, 그것도 한국 배우와 미국 배우가 한 무대에서 두 언어로 하나의 미션을 해내는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큰 무대에서 보아오던 연출가도 아니고, 배우들 역시 새로운 얼굴들이 많았는데도, 패션의 변화처럼 연극의 형식과 내용이 새로워 보였고, 외국에 나가도 화제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로제타'는 처음 접한 연극은 아니다. 지난해 강북문화예술회관 공연을 보았는데, 2023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초연했으니 3년간 다듬은 공들인 작품이다.
이미 보았던 작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김정한 연출의 초대와 가장 가까이 지내온 고인배 배우에 대한 성원, 그리고 명동예술극장에서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로제타' 관람 때는 연출이 보였다면 이번 명동 무대에서는 배우가 보였다.
필자의 솔직한 견해는 '로제타'는 연출가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연출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김정한은 미국 뉴욕에서 수학하고 그곳의 전통 깊고 실험성이 강한 극단 리빙 씨어터(1949년 창단)에서 인턴부터 시작해 현장을 익힌 실력파로, 이날 무대에서도 피아노와 기타를 치며 생음악 연주단의 이원으로 극의 분위기를 리드했다.
필자는 김정한 연출을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공연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미국 배우들을 출연시킨 자신의 연출 작품을 선보였고, 그의 열정과 실험성을 높이 평가한 필자는 이후에도 그와 교류를 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그는 국내에서 실험극, 상업극, 뮤지컬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 활동을 펼쳤다.
지난해 '로제타' 강북 공연을 보면서 연출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꼈다. 우선 김정한은 미국인 의사 겸 선교사로 조선과 한국에서 활동한 로제타 홀을 텍스트로 했다.
미국 배우와 한국 배우를 한 무대에 세웠고, 대사도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라이브 음악으로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회전이 가능한 원형 무대로 다양한 미장셴을 만들어냈다. 조명 디자인과 연출도 특이했고, 소품(보자기 등) 활용과 이벤트(천정에서 비가 오게 한 것)로 볼거리를 풍부하게 했다.
일기나 기록물에 의존한 전기(傳記)는 연극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김정한 연출은 전기 극임에도 웃음과 눈물, 팩트와 메시지의 전달은 물론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남녀 4명씩 8명의 배우가 모두 로제타 역할을 맡게 해 로제타라는 인물을 다각도에서 조명했으며, 상황에 따라 배우들이 멀티가 되어 장면을 완성 시키는 앙상블 연출이 돋보였다.
그런데 이번 명동 무대에는 단연 배우가 돋보였다.
광주 초연에 참가했던 리빙 씨어터 배우가 지병으로 작고, 지난해 강북 무대에서부터 중진 고인배 배우를 중심에 세웠고 이번에 새로 다매체에서 인기 있는 김성령 배우를 영입했다.
견민성, 원경식, 이경구 김하리, 브래드 버지스, 엠마 수 해리스 등 출연 배우 전반의 연령대도 높아져 연기 전반이 안정되었고 앙상블이 보다 견고해졌다.
“제 이름은 OOO입니다. 저는 로제타 역을 맡았습니다.”
극의 처음과 끝에 8명의 배우들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로제타 역할을 맡았다고 말했다.
왜 8명 모두가 로제타 역할을 하는지 궁금해하던 관객들은 극을 마칠 무렵에 또 한 번 이런 형식으로 배우들이 자기소개를 하고 빗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 모두가 로제타를 알리는 미션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배우들이 돌아가며 로제타를 연기하는 ‘앙상블 연출’ 방식에 대한 이해도 하게 된다.
명동 무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8명의 배우 모두가 ‘로제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는 점이다.
그가 왜 조선 땅에 왔으며 온갖 편견과 역경을 무릅쓰고 어떻게 의술(醫術)을 펼쳤는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몸속에 녹여 넣은 상태에서 연기에 임해 어떤 장면을 하던 성별이나 연령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혼연일체가 될 수 있었다.
극 중 로제타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김정한 연출은 이 선교사 겸 여의사 로제타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일까.
필자는 지난해 볼 때 핵심 주제를 찾지 못했는데 이번에 여러 자료를 보면서 그것이 선(善)임을 알게 되었다.
선, 선한 의지, 선한 영향력...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고,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미국인 로제타는 이 선을 한국인에게 행한 것이고, 그 수단이 의술이었던 것이다.
이 연극의 매력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문화의 교류와 융합이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문화적 차이를 김정한 연출은 한국어와 영어의 혼합 사용,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로제타를 연기하는 앙상블 연출, 선이라는 주제로 보편화함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게 했다.
'로제타'는 8명의 배우들이 자신의 연기를 n분의 1로 한다고 볼 수 있고 또 실제에서 비중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명동 공연에서는 지난해 합류한 고인배 배우에 이어 이번에 김성령 배우가 참여함으로써 드라마가 한층 명료해졌고, 앙상블의 강화로 생동감이 더해졌다고 본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 김정한 연출이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둘러앉아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현장 토크를 했는데, 이때 특별히 소개한 고인배 배우는 올해 연기 경력 49년의 중진으로 극의 중심 캐릭터에 맞았다. 김정한 연출이 추천한 것처럼 고인배 배우는 이번 명동 무대에서 적역을 맡아 정확한 화술로 극의 진실성을 높여주고 앙상블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필자는 고인배 배우가 동국대 대학원 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40여 년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교유하며,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거의 보아왔다. 그는 올곧게 연극 외길을 걸어온 성실한 배우로 수많은 작품에서 특유의 무게감 있는 연기를 보여왔다.
필자는 크고 작은 역할을 가리지 않고 성실히 연기에 임해온 그가 구태환 연출 ‘고곤의 선물’에 이어 ‘로제타’로 다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섰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김성령 배우의 이번 '로제타' 합류는 캐스팅의 한 수로 참신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인기배우가 아니라 극 중 앙상블 연기의 일원으로서 혼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소녀처럼 해맑았다. 그는 꾸밈이나 겉멋을 버리고 순수 그 자체로 극 중 로제타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캐릭터로서도 소임을 다했다. TV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순백의 연기로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선하면서도 신박한 연기를 보인 것이다.
'로제타'는 구한말 낯선 땅 조선에 와서 44년간 의료 및 교육 활동을 펼친 미국인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한 전기 연극이다.
편견과 차별을 견디며 의사로서의 미션과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수행한 그는 남편과 딸의 죽음까지 겪으면서도 선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린 박애(博愛)의 실천자였다.
김정한 연출은 전기 연극은 재미없다는 통념을 깨고. 창의적인 발상, 시선의 다양화, 표현의 다변화로 참신하면서도 공감을 주는 창 제작을 이뤄냈고,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과 협업함으로써 보다 완성도가 높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공연은 8월 31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