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17) 광복절을 효창공원 백범묘와 3의사묘역서 보내야 하는 이유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시간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슬픔이 있다. 세월이 약이라는 경험법칙에도 예외가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의 죽음이 그렇다.
백범은 1949년 6월26일 낮 12시36분, 자택인 경교장(京橋莊, 현 삼성강북병원)에서 육군포병 안두희 소위가 쏜 총알을 맞고 서거했다. 안두희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김구를 암살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구 주석의 장례는 국장(國葬)을 주장한 정부 측과 민족장(民族葬)을 주장한 임시정부 측이 합의한 ‘국민장(國民葬)’으로 10일 동안 거행됐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첫 국민장이었다. 묘소는 효창공원으로 정해졌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짓고 김성태가 곡을 붙인 조가(弔歌)가 전한다.
오호 여기 발 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 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이 겨레 이 강산이 미친 듯 우는 소리를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기로 든든한양 믿었더니
두 쪽으로 갈린 땅을 이대로 버려두고 천고한(千古恨) 품으신 채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떠돌아 칠십년을 비바람도 세읍드니 돌아와 마지막에 광풍으로
지시다니 열매를 맺으러 지는 꽃이런가 뿜으신 피의 값이
헛되지 않으리라, 헛되지 않으리라, 헛되지 않으리라
삼천만 울음소리 임의 몸 메고 가도 평안히 가옵소서
돌아가 쉬옵소서 뼈저리 아픈 설움 무여안고 끼치신 임의 뜻을
우리손으로 이루리다, 우리 손으로 이루리다, 우리 손으로 이루리다
- 이은상, '김구 국민장 조가' 전문.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탄의거와 그해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홍구공원 의거를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을 확실히 높였다.
1940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그는 1943년 12월1일에 발표된 ‘카이로선언’에서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대한민국이 자유독립국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루즈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이 40년 신탁통치안을 제기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던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이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 장개석 총통은 1969년 8월 23일, 목멱산(木覓山) 백범광장에 김구동상이 세워졌을 때 기념사를 보내 축하해주었다.
爲國家 求獨立 爲民族 爭自由 偉哉(위국가 구독립 위민족 쟁자유 위재)
斯人 興滅 繼絶 取義成仁 見 大節於顚沛(사인 흥멸 계절 취의성인 현 대절어전폐)
昭 正氣於千秋(소 정기어천추)
국가를 위해 독립을 구하고 민족을 위해 자유를 쟁취했으니 위대하도다
이 사람은 사라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끊긴 것을 다시 이었으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살아가는 동안 절개를 드러냈으니
그 올바른 정기가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리라
- 장개석, '백범김구선생동생건립기념' 전문.
장개석의 기념사는 백범기념관 1층에 전시돼 있다. 그 옆에는 백범께서 돌아가신 날 입고 있던 피 묻은 옷과 염하기 전에 평온하게 누워있는 사진이 있다. 2층 전시관 북서쪽에는 백범 묘소를 바라볼 수 있는 추모 공간이 있다. 기념관을 돌아나와 묘소를 참배한다.
“그래, 잘 지내느냐?”
‘왜 이리 늦게 왔느냐?’는
불호령 떨어질 게 두려워 쭈뼛쭈뼛 거리는데
어디서 부드러운 말 들린다
반갑다고 노래하는 까치들 합창소리 묻어난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도
뜨겁게 내리쬐는 뙤약볕도
잠깐 쉬어갈 만큼 고즈넉한 묘역
사람들의 무겁던 얼굴이 살포시 피어난다
평생 부끄럼 없이 꼿꼿했던
조국 독립의 믿음과 동포의 사랑이
안타까운 죽음 뒤에 살아남아
우리를 따뜻하게 품는다
“뜻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이룬다”
“초심을 잃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는
말없는 가르침이 가슴을 꽝꽝 울린다
“그래 잘 지내거라!”
- 홍찬선, '백범 묘소에서' 전문.
백범을 뵙고 나서 의열사(義烈祠)로 간다. 의열사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의 이동녕 임정원 초대의장, 조성환 군무부장, 차리석 비서장 및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안중근 장군 등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참배를 마치고 가는 곳이 ‘3의사묘역’이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가 묻힌 곳이다. 이곳에 안중근 장군의 초혼묘(招魂墓)가 있다.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해 혼이라도 와서 쉬라고 마련해 놓은 묘다. 하루빨리 주인을 찾아야 한다. 3의사묘역의 4기 묘 앞에 유방백세(流芳百世)가 새겨있다.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히 이어져 빛나라’는 뜻을 가슴에 새긴다.
3의사 묘역 입구에는 무궁화가 있다. 김구무궁화 윤봉길무궁화 이봉창무궁화 백정기무궁화다. 무궁화도 대한민국의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 아파하는지 잘 크지 못한다. 꽃은 피웠지만 꽃이 왠지 애처롭다. 3의사묘역 옆에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묘가 있다.
올 때마다 아프다
오로지 조국의 완전한 자유독립을 위해
오로지 대한의 백성들이 자유로운 독립국가에서 행복하기 살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하나뿐인 목숨까지 웃으며 바쳤는데
조국은 광복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이 갈린 채 불완전한 독립에서 고통을 겪고
독립된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조차 이행하지 못해
안중근 장군의 넋을 초혼묘로 겨우 달래며
오늘도 하릴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 현실이 또 아프다
- 홍찬선, '3의사묘역에서' 전문.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이자 순조(純祖, 1790~1834)의 이복 형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곳이다.
일제는 이곳을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1940년 문효세자 등의 묘를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한 뒤 ‘효창공원’을 만들었다. 빽빽하던 소나무 숲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1960년에 효창운동장이 만들어져 더욱 훼손됐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돌아 숙명여대 쪽으로 가면 조그만 공원이 있다. 그곳에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 655~?)을 낳았을 정도로 승려이면서도 중생과 아픔을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힘썼던 원효대사의 동상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생각한다. 원효대사 동상은 이곳에 1969년 8월16일에 세워졌다.
이곳은 원효로(元曉路)인데, 일제강점기 때 원정(元町)이던 것을 1946년에 원정의 원과 효창원의 효를 따와 지었다고 한다. 원효대사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은 원효로에 원효대사 동상을 세운 뒤에 나온 말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