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늘푸른연극제' 무대 선 박정자 대배우...연극 '꿈속에선 다정하였네'
- 혜경궁 홍씨 '한중록' 비극의 주인공으로 관객 감정 휘몰이 - 여든에도 꼿꼿한 자세와 불같은 열정...마음 깊은 곳 울림 안겨 - '햄릿'의 강필석 배우, 사도세자로 새롭게 합류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천의 감정, 천의 표정, 천의 목소리...박정자 대배우가 무대에 있음에...행복하였네
83세의 현역 박정자 배우가 열 번째 '늘푸른연극제' 무대(8월 7~10일, 서울씨어터 제로)에 섰다.
공연 작품은 2019년 2월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했던 '꿈속에선 다정하였네'. 고연옥 작, 한태숙 연출을 비롯해 스태프들이 다시 참여했지만, 무대는 좀 달랐다.
혜경궁 홍씨 역 박정자 외에 초연 때 복례 한 명이던 배우가 사도세자까지 두 명으로 늘었고, 작곡가 원일이 무대에 올라 라이브로 음악과 음향을 연주했다.
극장 환경도 더 나아졌고 배우도 늘려 변화를 주었지만 초연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였을까, 아니면 박정자 대배우에 쏠리던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되어서일까. 왠지 모르게 필자의 시선에는 새 무대가 조금은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객석의 몰입도는 전작보다 훨씬 강했다.
170석 만석의 관객이 극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80분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전 몰입 상태로 관극을 한 것이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대에 서오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온 대한민국의 대표 배우 박정자는 공연 내내 한자리에 앉아 말 한마디, 손끝 하나로 관객의 감정을 놀라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마법의 지휘자 같았다.
초연이 낭독 형식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공연은 드라마를 강화했지만, 노배우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창적 카리스마로 관객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한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분위기는 일반적인 관극 문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관객은 박정자 배우의 팬들인 단체였다고 한다.
아무튼 공연이 끝나자 박수는 나왔지만 객석 전체가 움직이지 않은 것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찐 팬이라면 기립박수를 치고도 넘칠 대배우의 공연 아니었던가.
2019년의 공연을 “관록의 목소리와 농익은 몸짓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명품 공연”이라고 리뷰했던 필자는 아무래도 당시의 무대와 감동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페이스북에 썼던 리뷰 일부를 옮겨보았다.
잘 빚어진 달항아리처럼 단아했지만 강렬한 박정자의 모노드라마
배우 박정자의 드라마 콘서트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는 잘 빚어낸 달항아리처럼 단아하고 우아하며서도 그 내면은 아리고 한스러웠다.
고연옥 작가가 시어(詩語)로 직조한 ‘한중록’을 한태숙 연출이 정갈하고 품격 있게 입체화한 '꿈 속에선...'은 박정자의 관록, 박정자의 목소리, 박정자의 열정으로 표출되었기에 극적인 드라마가 되어 관객을 몰아의 경지로 이끌었다.
박정자 배우는 통치마를 입고 한 그루 고목처럼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80분을 눈빛으로, 손끝으로, 풍상에 벼려진 목소리로 왕조시대 궁중 여인의 한(恨)서린 질곡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해냈다.
특히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살았던 사람, 한 번도 보낸 적 없이 이별한 사람”과의 야속함과 회한에 젖어 ‘꿈속에선 다정하였네’라고 나직하게 되뇌일 때는 가슴이 메었다.
서간 낭독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박정자 배우는 '소리극'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일찍이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로 자신의 캐릭터를 형성했지만 특히 이번 공연에선 누군가 표현했듯 '검고 아득하고 긁히고 그을린' 목소리로 음습한 역사의 비극적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소리 자체가 드라마틱한데 여기에 박정자의 농익은 연기가 가해지면 그 체감 온도는 더 올라갈 수밖에 없지않은가.
늘푸른연극제에 선정되어 다시 올린 이번 공연은 전작보다 공을 많이 들였다.
앞서 말했듯 '햄릿'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강필석 배우가 사도세자로 출연했고, 원일 작곡가를 무대에 등장시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전작에서 호평을 받았던 한태숙 연출이 이런 변화를 지휘해 한층 심도 있는 무대를 보여주고자 했다. 미술(박은혜), 조명(김창기), 영상(이지송), 의상 소품(이유숙) 등 스태프들도 심혈을 기울인 공연이었으나 박정자 배우 중심이던 무대 아우라와는 달라보였다.
그 변화가 좋은지 아닌지는 관객의 기호와 판단에 맡겨야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텍스트로 보면대에 대본을 얹고 하는 낭독극 형식에서 애증의 실체인 사도세자가 실물로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강필석 배우의 멋진 연기로 본다는 것은 매력일 수 있다.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강필석 배우는 미칠 지경에 처한 왕세자의 복합적인 감정을 응축된 연기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필자는 박정자 대배우 1인에게 집중되었던 관객의 시선이 분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일 작곡가는 조도가 낮아 생각보다 시선을 뺏지 않았지만, 궁인 복례와 번갈아 등장하는 사도세자는 전작에서 상상만 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강렬해 시선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김현아 배우가 맡은 복례 역은 전작 관극 경험이 있어 극 중 일부로 받아들였지만 사도세자의 등장은 상상력을 자극하던 박정자 배우의 ‘이야기’와 ‘집중도’를 분산시키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자 배우를 존경하는 필자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원로 연극인들의 빛나는 예술 활동을 공연으로 기리는 늘푸른 연극제에 60년 간무대에 서온 박정자 배우가 섰다는 것이다.
80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와 불같은 열정으로 연극의 심벌이 된 박정자 대배우를 그가 아끼는 공연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궁중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배우는 대사 한마디, 동작 하나를 직조하듯 온 정성을 다해 보여주었다.
특히 몇몇 극적인 장면에서 보여준 독백 연기는 박정자 배우만이 해낼 수 있는 매력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죽은 사도세자가 꿈속에서 나타나자 그 환영을 울듯이 반기는 표정과 품어 안으려는 애절한 몸짓 연기는 너무도 절절해 눈물이 날 정도였다.
요즘 유행하는 쇼츠나 짤로 남기고 싶은 ‘빛나는 연기 장면’이 전작보다 훨씬 많았고 울림도 더 강했다.
남편이 시아버지의 저주를 받아 뒤주에 갇혀 죽어야 하는데도 세자를 지키기 위해 살얼음판을 걸어온 혜경궁 홍씨.
그 역사적 인물의 복잡한 심경을 다층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은데, 박정자 배우는 감정의 기복과 애환을 목소리와 몸짓으로 오롯이 보여준 것이다.
이번 무대에서 고연옥 작가의 대사가 더욱 시(詩)적으로 감성적으로 다듬어져 박정자 배우의 화술 연기의 폭과 깊이가 풍성할 수 있었고, 관객들은 그 연기에 몰입될 수 밖에 없었다.
박정자 대배우는 특히 성우로 다진 천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펼쳐내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느끼게 해주었다.
원로의 자격으로 주어진 박정자 대배우의 이번 공연은 그의 열정 연기와 원숙한 매력에 기립박수로 화답하는 ‘멋진 늘푸른 무대’가 되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