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꽃이 밥이 되다 外
- [비평연대] 이솔림·배희주·김상화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꽃이 밥이 되다(김혜형 지음, 목수책방, 2025)
베란다에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분주한 날들이 있었다. 겨우 길이가 세 뼘 정도 되는 긴 플라스틱 화분에 마트에서 사 온 흙을 붓고 상추, 깻잎, 부추를 심었다. 출처가 믿음직스럽지 않은 씨앗인데도 거의 다 싹을 틔웠다. 잎이 하나씩 돋고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좋던지, 내 손으로 기른 걸 내 입에 넣는 게 얼마나 온전하게 느껴졌는지. 베란다 태생이라 맛도 향도 애매했지만 내겐 최고의 수확물이었다.
그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이 책을 만났다. 첫 문장부터 마음이 갔다. "도시에서 몸을 쑥 뽑아내 곧장 시골 흙에 옮겨 심었다." 평생 도시에서 나고 자란 출판편집자가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건 한순간이었다. 파주에서 강화로, 곡성으로 집을 옮기며 천 평 단위의 땅을 일구기 시작한 낙관적인 초보 농부는 마침내 농사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벼농사에 도전한다.
아는 것 하나 없기에 그의 주변엔 다정과 걱정을 담은 관심이 가득하다. 땅과 트랙터를 내어주는 마을 이장, 씩씩한 베트남 신부 은주 씨는 "내 논둑 베는 김에 남의 논둑 벨 수도 있는 것이고, 내 집 앞 치우다 내친김에 마을 길 청소도" 하는 사람들이다. 다정한 마음은 말 없는 생명에게도 닿는다. 풍년새우와 참개구리 머리 위로 차마 화학물질을 들이부을 수 없어 농약 없이 농사를 짓는 그 마음이, 희고 고운 쌀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처음엔 따끈한 쌀밥이 간절해지다가 읽어갈수록 왠지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책이다. 밥과 사랑이 삶을 돌아가게 하는 구심점이라면, 이 책은 무엇보다 삶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
■ 할 일은 많지만 아직도 누워 있는 당신에게(이광민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5)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지?”
일할 땐 누구보다 열심인데, 퇴근 후엔 바닥에 붙은 듯 일어나기 어렵다. 주말엔 늘어지게 누워만 있고 해야 할 일들은 머릿속에서만 둥둥 떠다닌다. 우울증은 아닌 것 같은데, 무기력이 온몸을 뒤덮고,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상태. 혹시 이 문장들에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면, 이 책이 작은 전환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정신과 이광민 의사는 말한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우리는 완벽을 기대하며 시작을 미루고, 그 미룸은 결국 자책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일상, 관계, 마음이라는 세 영역에서 스몰 루틴을 제안한다. 100% 완벽하게 해내려 하기보다 단 1%라도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연습.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달라지는 것.
이 책은 항상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쪽에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라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실마리를 건넨다. 할 일은 많지만 아직도 누워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건넨다.(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 용기론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5)
갑자기 사람도 만나기 싫고 내면으로 침잠하고만 싶어지는 때가 있다. 몸 에너지의 기본값이 평균보다 낮아져 버린 거다. 날은 덥고, 뉴스만 보면 피로하고, SNS도 재미없고, 집에만 오면 눕고 싶어지던 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용기를 잃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삶을 다정히 여길 용기'를. 그리하여 펼쳤다. '용기론'이다.
'용기론'은 "선생님. 용기란 대체 무엇일까요?"라는 편집자의 질문에 저자가 대답한 열두 편의 편지를 묶은 서간집이다.
저자 우치다 다쓰루는 일본의 철학 연구자이자 윤리학자. 그는 이 책에서 맹자와 공자, 프로이트, 레비나스, 카뮈 등 선대 사상가들의 이야기와 우치다 자신의 경험을 경유해 '용기'의 실체를 톺아 나간다.
용기의 속성, 용기의 발생 조건, 용기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 용기 발현을 어렵게 만드는 기업, 용기와 정직과 친절의 관계 등 그는 용기를 화두로 온갖 주제를 차분히 건드리면서 동시에 '용기론'을 거침없이 직조해 나간다. 고구마줄기처럼 얽히고설킨 듯 서술되다 막바지에 다다라 용기의 본질을 통쾌히 정의 내리는 우치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용기론을 실천해 낸 놀라운 지적 여정으로도 느껴진다.
그는 "용기란(연대가 성취되는 날까지 살아남기 위해) 고립을 견디기 위한 자질"이라 이른다. 타인의 이해와 공감은 본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 당장 주변에 나와 연대할 이가 없대도 희망을 놓지 않고 고립을 잠시 견뎌 보라는 것. 이렇게 발현된 용기는 '나와 다른 타자를 불쾌해하는 내 안의 나약함'을 인지시키고, 나를 조금씩 강하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 자신을 낯설고 두려운 환경 속으로 집어넣어(?) 보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 생애 처음으로 풋살 수업을 들으러 갔다. 형편없는 실력으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헛발질만 해대고 왔지만,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니 어쩐지 기운이 돌았다. 고작 풋살 수업 한 번으로 타인을 견디는 역치가 얼마나 높아졌을진 모르겠다. '용기론'을 완전히 실천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일단은 책을 재독하며 그다음 스텝을 생각해 보려 한다.(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