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문정희 시인의 '벌레를 꿈꾸며'
시는 인간 마음속 심상(心像)에서 피어나는 혼불과도 같습니다. 깊은 사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짧지만 응축된 언어문학의 보석과도 같은 시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좋은 시와 함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벌레를 꿈꾸며 /문정희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책벌레보다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검은 활자를 갉아먹고
홀로 꿈틀거리며
집 한 채도 짓지 못하는 책벌레보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초록 잎을 뗏목 삼아
돈벌레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겁이 나고
열매란 열매는 죄다 먹어치우고
모든 곳에 구멍을 뚫어놓는
식욕도 두려워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결국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속에 사는
작고 아름다운 각시별 같은
- 문정희 문학선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나남출판사, 2025)
문정희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 문학소녀’로 주목받았으며, 시집 '꽃숨'으로 등단한 이후 55년 넘게 활발히 활동해온 한국의 대표 시인입니다. 여성성과 생명의 근원, 고통과 치유, 존엄을 주요 주제로 삼아 깊이 있는 시세계를 펼쳐왔습니다. 작품은 11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2023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시비가 세워지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시집으로는 '남자를 위하여',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한계령을 위한 연가' 등이 있습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시카다상 등 국내외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동국대와 고려대에서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2022년부터는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으로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