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10) 무령왕릉과 공산성서 백제 미소를 보다

2025-07-21     홍찬선 칼럼니스트
공주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갈 때마다 새롭다. 자주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볼 때마다 설렌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 462~523)릉 얘기다.

무령왕은 일본 규슈 가카라시마(加唐島)의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해변에 정박 중이던 배 안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백제의 동성왕(東城王, ?~501)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 23년 동안 재위하며 백제 부흥의 기반을 닦은 뒤, 아들인 성왕(聖王, ?~554)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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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1971년에 우연히 발견됐다. 송산리 6호 왕릉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던 왕릉이 발견됐다. 일제에 의해 도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로 발굴된 유일한 백제왕릉이다.

무덤 안에는 무덤의 주인이 ‘백제 사마왕(斯麻王)’임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있었다. 이 묘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됐다. 묘지석 외에 무덤을 지키는 석수(石獸)와 무녕왕의 금제관식 등 모두 12개가 국보가 됐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었습니다
천 사백 사십 육 년이나 땅 속 깊이 묻혀 있다가
천 구백 칠십 일 년에 우연히 곡괭이 끝에 걸린 것은
이제 때가 됐으니 세상에 나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낮은 봉분이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공주 송산리 여섯 번 째 왕릉 뒤 조그마한 무덤은 아예 왕릉이라는 상상마저 지웠습니다
덩치가 커 일제의 눈에 띄었더라면 무녕왕은 없어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무녕왕이 후세를 위해 남긴 기록은 단군처럼 그날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귀여운 석수(石獸)가 무녕왕의 마음을 밝게 알아 
천 사백 사십 육 년 동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두 귀 활짝 열어 
무덤의 비밀을 굳게 지켰습니다 

키가 팔척이요 눈썹이 그림 같아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던 
무녕왕 사마(斯摩)는 
죽어서 들어갈 땅을 무단 점거하지 않고 땅값을 후하게 치러 
지신도 감동해 그를 따듯하게 보호했습니다

나날이 쪼그라들고 다달이 잊혀 가는 
백제가 더 이상 초라해져서는 안될 때
무녕왕은 배수로로 신호를 보내
어둠에서 밝음으로 멋지게 부활했습니다

- 홍찬선, '무녕왕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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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발굴 초기에는 발굴 초기부터 상당 기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하지만 보존을 위해 개방을 하지 않는 대신 왕릉 앞에 무덤모형과 함께 무녕왕릉에서 발굴된 유물 등을 소개하는 기념관을 만들었다.

기념관 입구에 멋진 금송(金松)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금송은 중생대부터 전 세계에서 자랐지만 모두 멸종하고 지금은 일본에 단 1종만 남아 살아있는 화석으로 알려진 소나무다. 금송이 여기에 심어진 이유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관이 바로 금송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령왕의 관이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은 무령왕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무령왕릉을 본 뒤 찾은 곳이 국립공주박물관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국보 12개를 포함해 금동관음보살입상 등 국보 17개, 서혈사지석불좌상 등 보물 4개 등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29만4608점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나태주 시인의 시 '무령왕릉'이 반갑게 맞이했다.

누가 있어 백제를 사라졌다 그러는가
한반도의 한 가슴 눈부셨던 한 나라
고요와 미소의 나라 여기 와서 보시라

공주라 무령왕릉 천오백년 잠을 깨어
하늘 아래 연꽃으로 둥그스름 피었으니
임금님 무령 임금님 오늘에도 뵈옵네

불꽃 모자 비단옷 구슬소리 울리며
세상을 굽어보고 백성들 보살피러
오시네 저기 오시네 우리 임금 오시네

보소서 보옵소서 우리들 하루하루
소금 바다 괴론 인생 굽어살펴 주시옵고
그날의 화평과 사랑 오늘에도 주옵소서

- 나태주, '무령왕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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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기념관에서 사진과 모형으로만 봤던 무령왕릉 묘지석과 관꾸미개, 금귀걸이 등 국보를 실물로 보며 감동했다.

특히 눈을 사로잡은 것은 국보인 ‘금동관음보살입상’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백제 불상’으로 꼽히는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둥근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하다. 머리 위에 장식된 보관(寶冠)은 작은 불상 모양이다. 오른손은 연꽃 봉오리를, 왼손은 정병을 쥐고 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아 어깨까지 늘어뜨렸고, 천의(天衣) 자락은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교차한다.

어깨에 걸쳐진 영락(瓔珞)은 배 부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연꽃대좌는 낮지만 안정감을 주며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사진을 보니 내 옆에서 어린이가 삼매에 빠진 모습이 있었다.

아홉 살 어린이도 

백제의 미소에 푹 빠진 것이었다

오른손엔 연꽃봉오리를 살포시 들고
왼손엔 정병을 사뿐하게 말아쥐고
아픈 사람을 모두 보듬겠다는 뜻을 보이는
관세음보살의 넉넉한 미소에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어깨까지 드리우고
시원하게 흘러내려 부드럽게 엇갈리는 옷자락에
천오백 년의 비밀을 가득 간직하고 있는 모습에

얼을 빼고 바라보다 놓친 어린이의 삼매를
카메라가 빠뜨리지 않고 순간을 잡았다

- 홍찬선, '백제의 미소에 빠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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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소의 아쉬움을 달래며 공산성으로 갔다. 공산성은 웅진백제 시대에 도성(都城) 안에 있던 왕성(王城)이다. 한양도성 안에 있는 경복궁과 같은 것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며 해자(垓子)가 되는 천혜의 요새다. 성벽의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660년 백제가 망할 때,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은 의자왕(義慈王, ?~?)이 이곳 공산성(당시는 웅진성으로 불림)으로 몽진(蒙塵), 재기를 꿈꿨다. 하지만 부하의 반역으로 포로가 되어 당(唐)으로 끌려가 낙양(洛陽)의 북망산에 묻혔다.

공산성

공산성은 인조(仁祖, 1595~1649)가 ‘이괄의 난’을 피해 잠시 지낸 곳이다. 그때 우성면 목천리에 살던 임씨 집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했다. 배가 고팠던 인조는 이 떡을 맛있게 먹으며 떡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떡의 이름이 없었다. 인조는 임씨 집에서 떡을 진상했다는 소리를 듣고 임절미(任絶味)라고 불렀다. 임절미가 인절미가 됐고 공주사람들은 공주떡으로 불렀다. 맛있는 떡으로 유명한 ‘압구정 공주떡’이 바로 그것이다.

그날 역사는 잠시 끊겼다
해동증자로 이름 날렸던 
의자(義慈)는 믿었던 부하의 
배반으로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거친 황해 헤치고 당으로 끌려갔다

그날 이후 역사는 잠깐 꿈틀댔다
도침과 흑치상지가 부여풍과
임존성에서 끊겼던 역사의 숨결
다시 이으려 떨쳐 일어나
아직 끝난 것 아님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날로 역사는 
천 오백 년 잘린 것이었다
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은 사람까지 숨죽여야 했다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한 웅녀가
두 아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고마나루에 몸 던진 단심(丹心) 있어
웅진은 공주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 홍찬선, '공산성에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