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감독의 AI스토리텔링] 인공지능으로 글쓰기 한계 실험 중인 'AI 모험가' 전혜정 작가 ①
[인터뷰365] 'AI스토리텔링 연구자' 전혜정 작가 - AI 활용한 창작 연구에 몰두...웹소설 쓰기 실험 중 - 생성 AI는 보조 도구 아닌 제안자 혹은 ‘유사-타자(他者)’ - 생성형 AI, 중간층 붕괴와 실력 양극화에 영향 줄 것
AI스토리텔링은 인공지능(AI)이 사람과 협력하거나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하는 기술 및 개념을 의미합니다. 스토리텔링 작법서 '4줄이면 된다'의 저자 이은희 감독이 AI스토리텔링에 관심 있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만나 4가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듣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이번 <'AI스토리텔링 연구자' 전혜정 작가>편은 2회로 나눠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인터뷰365 이은희 인터뷰어(/감독 겸 작가) = 전혜정 작가는 자신을 록 음악과 장르물, 게임을 좋아하는 오타쿠이면서 스토리 작가이자 연구자라고 소개한다. 23살 때 썼던 단편 소설 ‘아무도 몰라’가 우연한 기회에 출판된 이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미대-디자인 전공으로 박사까지 공부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청강예술산업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거기다 직접 웹소설을 쓰고 ‘지식백과’나 ‘과학하고 앉아 있네’ 같은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다.
그런 그는 요즘 챗(chat) GPT PRO 버전과 구글 제미나이 울트라(ULTRA) 버전, 클로드(Claude) 등으로 웹소설 쓰기를 실험 중이라고 한다. 각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최고 사양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시 정지를 당하기 일쑤라니 얼마나 지독하게 생성형 AI를 귀찮게 했는지 알법하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생성형 AI 사용기, 아니 모험기를 들어보자.
1. 여정과 경험
- 창작자 의도와 AI결과물 사이의 ‘미세한 왜곡’ 조율이 AI작업의 핵심
- AI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어떤 경험과 성과를 이뤘는지요?
"생성형 AI를 활용한 창작 연구를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주로 언어와 이미지의 상호작용, 프롬프트 실험, 스타일 전환의 서사적 의미 등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운영해 왔습니다. 미드저니와 DALL-E, ChatGPT를 혼합해 기획–아이데이션–시각화–편집–서사 구조화까지, 전 단계를 실험했고, 이 과정에서 생성 AI를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닌, 제안자 혹은 ‘유사-타자’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성형 AI를 주로 언어와 이미지의 상관관계를 탐험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습니다. 예술 사조, 문화적 맥락, 기술 용어, 심지어 추상적인 감정 표현까지 다양한 언어를 프롬프트로 실험하면서 AI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학습'하고 '그림을 해석'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또한, 실제 유튜브 섬네일이나 수업 교안 삽화 등 실용적인 이미지 생성 작업에도 AI를 활용하며 그 효용성과 명백한 한계를 동시에 체험하고 있습니다."
- 그럼 실제로 창작 작업에도 적용하고 계시나요?
"최근에는 인공지능으로 글쓰기의 한계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제미나이로 쓴 소설의 첫 화가 있어요. 전 1화를 쓰기 전에 제미나이에, 전체 이야기 구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시놉시스와 함께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줬고, 캐릭터들의 설정이 어떤지도 대략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캐릭터에 대한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던지면, 제미나이는 ‘그럼 그는 완벽주의자여야겠군요. 그의 성격이 아들에게는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하며 제 아이디어를 받아 논리적으로 연결 짓더라고요. 이어 제가 원하는 장르와 글의 분위기도 대략 요청했습니다. 즉 기획에 대해 충분히 알려준 뒤, 회차별로 구조를 짜보라고 한 뒤, 회차별 제목과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일치하면 1화를 먼저 써보라고 시킨 것입니다.
다음의 글은 오컬트 호러, 심리 미스터리,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숨 막히는 분위기, 진우라는 소년과 부모님과의 관계,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결과에 따라 작성된 것이죠."
1. 완벽한 집
우리 집은 완벽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건축가라기보다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이 집은 그의 가장 오만한 작품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 회색의 요새. 그는 직선과 평면을 병적으로 집착하여, 모든 가구와 벽이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도록 설계했다.
개인의 삶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의 예술적 결벽증을 전시하는 거대한 쇼케이스였다.
이 완벽한 집에서 가족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신경질적인 신(神)이었고, 어머니는 그 신을 모시는 순종적인 여사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숨죽여 지켜봐야 하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어젯밤, 이 완벽한 집의 질서가 처음으로 무너졌었다.
늦은 밤, 아버지의 작업실 문이 굳게 닫혔고, 그 후 집은 이전보다 더 깊고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저 내 방에서,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 집의 유일한 규칙은 언제나 침묵이었으니까.
-이하 생략-
- 이대로면 생성형 AI만으로 정말 완결까지 갈 수 있을까요?
"제미나이는 앞으로 100편 완결을 목표로 써낼 수 있다고 합니다.(믿기지 않지만요) 반복해서 회차를 시키면 계속해서 같은 분위기로 매회 같은 구조로 매회 반복적인 느낌으로 생산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한 번 칭찬을 해주면 그것을 반복하려 하거든요. 그러나 인간 프로 작가는 1화에 어울리는 글과, 2화에 어울리는 글, 10화에 어울리는 글이 다 다르다는 건 압니다. AI는 그걸 잘 모르기 때문에 칭찬받은 방식을 또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매화 일상이 진행되더라도 그 아래로는 큰 플롯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제가 시키지 않으면 그런 것들을 서서히 빌드업을 해내는 기술을 자꾸 놓칩니다. ‘이번 화에는 이런 떡밥이 풀려야 하지 않아?’라고 하면 갑자기 그걸 너무 핵심 소재로 써 버림으로써, 은은하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미스터리물로써는 영 김이 새죠. 또한 피드백을 많이 주면, 몇 화 이전으로 훅 돌아가기도 합니다. 매화 다양한 방식의 피드백이 업데이트가 안 되어 건망증을 보이며 몇 화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 이 과정에서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게 되었겠군요.
"인간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굳이 의식하고 있지 않아도 당연하게 아는 논리적 사고, 그러나 사소한 오류가 생기는 순간 독자가 개연성이 깨진다고 느끼게 만드는 ’캐릭터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을 AI는 직관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A라는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의 서사를, 다른 모든 캐릭터도 동시에 알고 있을 것이라고 자꾸 간주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 보조 작가라면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던 부분을 추가로 피드백하면서, 주요 사건들을 각 캐릭터 간에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며, 이것들을 서로 언제 깨닫는지 표로 정리해 보라고 시켜야 했습니다.
AI는 빠르고 천재적인데, 반면 어떤 부분을 생각조차 못 하는지 발견함으로써, 거꾸로 인간 직관의 방식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인간의 소설 쓰기 행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AI와 작업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입니다."
- 그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나 순간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세요.
"처음에는 생성형 AI로 그림을 만드는 실험을 많이 했기에, 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스토리텔링과 연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제가 연구하는 분야 중에 비주얼 스토리텔링도 있기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드저니 초기에 '못 그린 그림'이나 '얼굴이 없는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AI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름답다'라고 여기는 보편적 미감으로 회귀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어설픈 아이 그림 스타일이나 왜곡된 인체 비례를 주문해도, AI는 기어코 '고수가 일부러 못 그린 듯한' 느낌으로 미감을 보정해 버리곤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AI가 단순한 이미지 생성 도구가 아니라, 대중적 취향이라는 거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적 미감’을 드러내는 거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계적 미감’을 다이소 예술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다이소를 비하하려는 의미라기보다, 제가 다이소를 좋아하고, 보편적인 생활의 질의 누리는 목적으로 아주 잘 활용하기 때문에 사용한 비유입니다."
<전혜정 작가가 제일 처음에 ‘다이소 예술’을 언급한 것은 본인의 페이스북이었으나, 공식적으로 언급한 곳은 2024년 4월 22일 경희대학교 대학원 학보에 기고한 ‘[제266호 인문 학술: 인공지능 예술] 인공지능 시대 우리의 처세’라는 본인의 글이다.>
-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주신다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미드저니를 이용해 ‘셜록 홈스가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을 구현하려 한다면, BBC 드라마 속 배우 얼굴이 고정적으로 등장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반복됐습니다. 그것이 셜록 홈스라고 했을 때 많은 대중이 떠올리는 이미지인 거죠. AI의 한계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AI의 본질과 그것이 의존하는 인간 데이터의 편향성을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많은 프롬프터는 초기에 일명 ‘자판기 단어’라고 하여, 효과적으로 이미지 결과물을 내는 데 도움이 되는 키워드를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사회와 문화와 사조와 시대와 기술의 맥락에서 어떤 단어로 호명되는지를 알아야, 가장 유사하게 자신의 기대대로 출력되기 때문입니다. 언어-이미지가 짝이 지워져서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AI가 단어의 의미를 진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AI가 학습했을 만한 효과적인 전문 용어를 잘 쓰는 건, 어느 수준까지 도달한 이후에는 큰 의미가 사라집니다. AI는 개별 프롬프트의 단어에 대해, 각각의 정의나 진짜 의미를 이해해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저 눈치껏 ‘이 정도 크기의 의미 필드 안에서 양해되는 범위’로 대응합니다. 아주 넓고 오차가 많으며 부정확한 의역입니다."
- 느낌적인 느낌이라니, 이보다 더 비과학적인 표현이 있을까 싶은데요.
"AI는 프롬프트의 단어를 깊이 이해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패턴을 찾아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드저니에서 ‘셜록 홈스’를 그려달라고 했을 때 반복적으로 BBC 드라마 속 배우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은, AI가 ‘이것이 대중들이 셜록 홈스라는 기표에 가장 강력하게 연관시키는 이미지’라고 확률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AI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의심하거나, 다른 가능성을 창의적으로 모색하지 않습니다. 그저 학습된 데이터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률 높은 길을 선택할 뿐입니다. 이렇게 부정확한 의역의 영역에서 소통하다 보면, 인간 창작자의 의도와 AI 결과물 사이에 끊임없는 ‘미세한 왜곡장’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왜곡’을 감내하고 다시 조율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지금 AI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일까요? 가끔 창작하는 분들이 AI를 시키느니 직접 하고 말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세요.
"이러한 명확한 의미를 알지 않아도 되는 상태는, 그냥 모호한 소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호한 언어로 대충 도달률과 해상도가 떨어지는 소통‘장’의 상태이기 때문에, AI가 인간보다 더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에도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밈적 사고(Meme-tic thinking, 밈을 통해서만 혹은 사고의 일정 부분을 밈에 의존하며 특정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자신의 주관 대신 밈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라는 인지 습관을 떠올려 봅시다.
의외로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사들은 생각보다 큰 의미가 없으며, 어떠한 통찰이나 지적이 단계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상대가 하려는 말이 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밈으로 반응하는 것을 대화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밈만 밈이 아닙니다. 통찰 없는 속담, 그 사회 특유의 문화적 사고, 한국은 유교적 사고가 되겠군요. 특정 종교적 가치관도 자칫하면 밈이 됩니다. 즉, 사안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어 분석하고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고 사유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건너뛰고, 머릿속에 저장된 가장 손쉬운 패턴(그것이 언어적 오류든, 사회적 편견이든)을 자동으로 꺼내 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AI의 확률적 예측 모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사람들끼리도 의미를 가지고 교류한다기보다 그저 밈적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AI의 불확정적 대화 방식은 그리 놀라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밈적 사고'는, 데이터의 통계적 패턴에 따라 다음 결과물을 예측하는 AI의 연산 방식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흔히 인간이 AI보다 우월한 이유로 '의식'이나 '주체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언어와 생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익숙한 패턴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에 있다면, 그 의식은 과연 AI의 연산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AI의 등장은 우리에게 인간의 창의성이란 무엇인지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미 AI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 생각하시기에, AI 스토리텔링이 대중과 산업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은 반복된 현상이었습니다. 산업혁명 때 방직기가 수공업자를 대체했고, 컴퓨터가 수많은 계산원과 타이피스트를 대체했지만, 결국 사회는 새로운 산업과 직업을 만들어내며 적응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AI 역시 그 연장선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AI가 가져올 충격은 과거의 기술 혁명과는 ‘속도’와 ‘규모’ 면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서 가장 파괴적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AI가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의 본질입니다.
첫째, ‘속도’가 너무 빨라 사회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이나 정보화 혁명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사회는 교육 시스템을 바꾸고, 새로운 법규를 만들고, 노동자들은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최소한의 유예 기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생성형 AI 혁명은 개인의 재교육은 물론, 사회 시스템이 변화를 따라잡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속도입니다.
둘째, ‘규모’가 전례 없이 광범위하고 파괴적입니다. 과거의 기술은 주로 인간의 육체노동이나 반복적인 정신노동을 대체했습니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창의성, 기획력, 판단력, 즉 화이트칼라와 크리에이티브 산업의 핵심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특정 직군 몇 개가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지적 노동(Mid-level intellectual labor) 자체를 통째로 소멸시킬 수 있는 규모입니다."
- 단순히 영향을 미친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복적인 변화가 있겠군요.
"이 두 가지, 즉 감당할 수 없는 속도와 전례 없는 규모의 결합이 낳는 가장 큰 영향은 바로 ‘중간층의 붕괴와 실력의 양극화’입니다.
이것이 제가 AI를 ‘사다리 걷어차기 기술’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미 높은 수준의 안목과 기획력을 갖춘 최상위 전문가는 AI를 강력한 에스컬레이터처럼 활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실력을 쌓아야 하는 주니어와 중간급 실무자들은 그들의 훈련장이었던 ‘업무 과정’ 자체를 AI에 빼앗기게 됩니다. 수많은 B컷을 만들어보며 안목을 기르고, 서툰 기획안을 제출하고 피드백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이 통째로 자동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산업은 소수의 AI를 지휘하는 ‘SSS 급 기획자’와,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단순히 반복적으로 다듬는 ‘오퍼레이터’로 양극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간에서 허리 역할을 하며 경험을 축적하고 성장해 나가기 위한 가교로서의 사다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다리를 올라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AI가 산업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단순한 일자리 감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직업적 성장 기회를 박탈하고, 사회 전체의 ‘생각하는 근육’을 약화해 장기적으로 산업 생태계 자체를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기술 혁명과 AI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위험한 차이점입니다."
- AI 스토리텔링 작업에 대한 개인적 정의와 활용 방식이 궁금합니다.
"저에게 AI는 '말을 안 듣기에 재밌는 장난감'이자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외계인 같은 부사수'입니다. 포토샵과 같은 기존의 도구들은 나의 수족처럼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진화했지만, AI는 내 의도를 100%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으며 끊임없이 '미끄러집니다'.
저는 이 통제 불가능성을 ‘실패’가 아닌 AI와의 협업의 본질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AI를 머릿속의 완성된 이미지를 인화하는 사진기처럼 쓰기보다, 제 기획이 모호하거나 막혔을 때 수많은 초안(B컷)을 제안하게 하는 아이데이션 파트너로 활용합니다. 그 예측 불가능한 제안들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최종 선택과 판단이라는 인간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 그것이 제가 AI를 활용하는 핵심입니다."
2. AI 스토리텔링의 본질과 가능성
- 창조, 인간과 기계의 협업 과정으로 확장되는 중
- AI 스토리텔링 기술, '보편·평균' 굴레는 한계
- AI 스토리텔링을 '창조'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네, 충분히 '창조'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주체와 방식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합니다. 현대 미술에서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 변기를 '샘'으로 명명하며 작가의 '개념과 선택'이 창조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듯이, AI 스토리텔링 역시 인간의 기획, 발상, 그리고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핵심입니다.
AI는 짜깁기가 아니라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매번 새롭게 이미지를 생성하며, 이는 인간이 기존 문화를 흡수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유사합니다. 다만 AI에는 인간과 같은 '의도'가 없으므로, 그 결과물에 대한 윤리적 책임(저작권 침해 여부 검토 등)은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 그것을 상업적으로 사용하기를 결정하는 순간의, ‘선택하는 인간’의 몫이 됩니다. 창조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가 협업하는 새로운 과정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 인간 작가의 창작과 비교할 때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나요?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경이(thaumazein)를 느끼고 질문을 던지는 능력'의 유무라고 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 철학은 '경이'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서 문득 낯섦을 느끼고 '왜?'라고 질문하며, 그로부터 창작의 욕망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AI는 스스로 무언가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내면에서 비롯된 창작의 욕망이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몸으로 시대를 겪어낸 '역사'를 가지고 창작하지만, AI는 데이터로 학습할 뿐, 직접 살아낸 경험이 없습니다. 이 '경험의 부재'와 '욕망의 부재'가 AI와 인간 창작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 AI 스토리텔링이 인간 창작을 보완하는 방식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보나요?
"가장 실질적이고 강력한 보완은 '아이데이션(Ideation, 창작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떠올리고, 결합하고, 발전시키는 일련의 사고 활동) 단계에서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인간은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보통 서너 개의 대안을 놓고 고민하지만, AI는 수백, 수천 개의 시각적 초안을 지치지 않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창작자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고, 창의적 막힘(creative block)을 뚫어주는 강력한 조력자가 됩니다.
허술한 기획이나 모호한 니즈만으로도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문턱을 낮춰주며, AI가 제안한 의외의 결과물에서 영감을 받아 기존 기획을 수정하거나 발전시키는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즉, AI는 '정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창작자가 더 넓은 선택지 위에서 더 나은 '질문'을 던지도록 돕는 '산파' 역할을 합니다.
둘째, '창의적 단순 반복 작업의 자동화'입니다. 창작 과정에는 핵심적인 기획 외에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소모적인 작업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게임 속 수백, 수천 개의 아이템이나 지역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는 작업, 혹은 수많은 조연급 등장인물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작업에 작가의 많은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AI는 이러한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작업을 효과적으로 처리해 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캐릭터 이름 후보를 순식간에 생성하거나, 작품의 분위기와 설정에 맞는 다양한 소재나 아이디어 목록을 만들어주는 식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 창작자는 단순 반복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한정된 창의적 에너지를 플롯의 핵심 구조, 주인공의 감정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 등 정말로 중요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작가가 더 깊이 있는 사유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매우 실질적이고 강력한 보완책이 될 것입니다."
- 현재 AI 스토리텔링 기술이 가장 크게 한계에 부딪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한계는 '보편적 아름다움'과 '평균적 취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점입니다. AI는 수많은 인간이 '좋다'고 선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했기 때문에, 결과물이 대체로 '다이소'처럼 무난하고 안전한 미감의 범주에 머무릅니다. 예술이 때로 낯설고, 불편하고, 기존의 미적 기준을 깨부수는 전복적인 시도라면, AI는 이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는 패기가 부족합니다.
또한, '당나귀 위에 개, 개 위에 고양이'처럼 복잡한 공간 관계나 문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단어에 대한 편견이 강해 창의적인 표현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결국 90%의 퀄리티까지는 쉽게 도달하지만,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100%의 창의성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명백한 한계입니다."
전혜정 작가는 본인을 ‘SSS 급 기획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그가 생각하는 SSS 급 기획자라면, 응당 추진력이 탁월하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끌어내는 실행력까지 갖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준대로라면 그는 ‘아직은’ SSS 급 기획자 아닐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다음 작업 계획을 묻는 말에 AI를 활용해 진행해 보고 싶은 작업을 쉴 새 없이 소개했다. 그가 지금 AI와의 작업에 정점이 있다는 다른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