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영화감독 백학기의 시네스토리] '성춘향'(1961) 배우 김진규와 최은희·허장강·도금봉

[내 가슴에 남아있는 한국고전영화와 그 배우들(17)] - 韓 최초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신상옥 감독 시대를 열다

2025-08-26     백학기 칼럼니스트
성춘향

[내 가슴에 남아있는 한국고전영화와 그 배우들(16)] '하녀'(1960)와 배우 김진규·이은심·주증녀·엄앵란·안성기 이어서

인터뷰365 백학기 칼럼니스트 = 1961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은 특수 렌즈로 찍은 촬영본을 넓은 화면(와이드 스크린)에 생생한 색감으로 구현한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다.

당시 은막의 여배우 김지미를 춘향이로 내세운 홍성기(洪性麒) 감독의 '춘향전'과 격한 경쟁을 벌여 개봉 당시 '김지미냐?, 최은희냐?'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관객 35만 명이라는 놀라운 흥행 성적으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제쳐 이른 바 신상옥 감독 시대의 화려한 출범을 알린 게 바로 '성춘향'이다. '성춘향'은 화려한 색감을 통해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등 한국 영화 산업의 기술적 변화를 보여줬으며, 해외 영화제에도 출품돼 국내외에서 흥행작으로 널리 인정받은 작품. 영화사적 의의가 높다.

‘춘향전’의 스토리는 잘 알려진 대로 남원의 기생 월매(한은진 분)의 딸 춘향(최은희 분)과 양가집 자제 이도령(김진규 분)의 러브 스토리다. 백년 가약을 언약한 사이이나,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새로 부임한 변학도(이예춘 분)는 절세의 미녀 춘향을 탐하는데. 그러나 춘향은 끝내 변학도의 수청을 들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옥고를 겪는다. 한편 과거에 급제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출도, 변학도를 처단하고 춘향을 구한다.

최은희

'성춘향'은 출연진도 화려했다. 이 도령 역의 김진규를 비롯해 방자 역의 허장강, 향단의 도금봉, 변학도의 이예춘, 월매의 한은진 외에 구봉서, 김희갑, 양훈 등이 열연했다.

볼거리도 많았다는 게 당시 관객들의 평이다. 당시 동아일보(1961. 2. 8)는 “춘향이 내일이면 목이 잘리는 전날 밤 춘향과 이 도령의 옥중 상봉 장면, 춘향의 수절 장면에서 최은희의 가을 찬서리같은 서슬 퍼런 연기가 일품이었다”고 전한다. 여기에 동편제 소리꾼 만정 김소희의 간장을 녹여내는 창이 장면의 비장감을 고조시켰다.

춘향과 이 도령이 이별 장면에서 거문고 줄을 칼로 끊는 장면, 춘향의 목을 베기 위한 망나니의 칼춤, 양주 별산대놀이와 대취타 연주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스펙터클 장면들이 화면을 장식했다.

허장강

방자와 향단이 역할을 맡은 허장강, 도금봉의 앙상블 연기도 '성춘향'이 성공하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배우 허준호의 아버지로 유명한 허장강은 짙은 눈썹과 큼직한 이목구비로 희극적인 역할을 많이 맡은 배우. 코미디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유명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대사의 줄임말 '우심뽀까' 원조가 바로 허장강이다. 허장강은 악역을 자주 맡았다. 그 외에도 평범한 소시민,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커리어 내내 훌륭하게 소화했다.

1925년 경기도 고양 출생인 허장강은 본명이 허장현이나 예명인 ‘장강’(長江)은 ‘뚝섬의 물이 마를 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살고 대성하라’는 뜻으로 연극연출가 겸 영화감독 서항석이 붙였다고 전한다.

1944년 태평양가극단 입단(연극배우)해 10년 뒤인 1954년 아리랑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약 20여년 동안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대배우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는 허장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1975년 9월 21일, 연예인 축구 대회 도중 심장마비로 향년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최은희

여배우 도금봉(都琴峰)은 1950년대 후반 악극에서 영화계로 전향한 대표적인 여성 배우다. 본명은 정옥순(鄭玉順). 1957년 '황진이'(조긍하 감독)에서의 활약을 시작으로 영화배우가 되어, 1960~70년대에 주연 못지않은 조연이라는 좋은 평을 받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 '황진이'에 출연하면서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의 '도(都)'와 황진이가 즐겨 탔던 가야금의 '금(琴)' 그리고 영화계의 우뚝 솟은 봉우리 뜻으로 '봉(峰)'을 취하여 도금봉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도금봉은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요부(妖婦)에서부터 한국적 여인상에 이르기까지 극단을 오가는 역할을 맡아 폭넓은 연기력을 발휘했다. 배우로 5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 출연했다.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1997년)에서 단역 출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서울 삼청동에서 복 요리집을 운영했으나 2000년에 사업을 정리하고 은거했다는 후일담이다. 그 후 2009년 6월 3일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