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外
- [비평연대] 배희주·김상화·백희성·김성신·이솔림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우종영 지음, 메이븐, 2019)
인간은 하루에도 150번 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으려 애쓰고 그 부담에 짓눌릴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는 바쁘게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이끈다.
30년 동안 아픈 나무들을 돌봐온 '나무 의사' 우종영 저자는 삶의 순간마다 나무에게 길을 물었다고 고백한다.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 앞에서도 그는 늘 내일을 의식하지 않고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에게서 답을 찾았다.
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키우는 데 모든 영양분을 쏟기 때문이다. 햇볕이 아무리 따뜻해도, 주변 나무들이 저만치 자라나도, 그 나무는 묵묵히 땅속 깊은 곳으로만 뿌리를 뻗으며 ‘유형기’를 지낸다. 어떤 가뭄에도 꺾이지 않을 단단함을 기르기 위해서다.
어쩌면 지금 견디기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는 누군가는 삶이 던진 어떤 선택 앞에서 조용히 유형기를 통과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성장은 없고 늘 제자리걸음 같지만, 사실은 깊이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중일지도.
나무는 빠르게 자라지 않는다. 대신 뿌리를 내리는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힘을 갖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자인 나무는 그렇게 말없이 묵묵히 단단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최승호 외 지음, 문학동네, 2023)
"삶이 가려울 때 시를 읽자." 내가 어느 날 블로그에 써 둔 말이다. 그러나 '삶이 가려울 때'가 언제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면 나는 그 즉시 알아챈다. 그것은 하나의 직감이자 느낌이니까. 언어가 필요한 느낌, 사람이 필요한 느낌, 고독이 필요한 느낌. 필요의 대상은 때에 따라 바뀐다. 그것을 내 뇌는 순간적으로 '삶이 가려울 때'로 언어화한 것이다. 느낌의 언어화다.
이런 매커니즘이 시에는 늘상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진술뿐인 시도 있고, 묘사뿐인 시도 있지만 좋은 시에는 대체로 진술과 묘사가 이 느낌의 언어화 과정을 경유해 마구 뒤섞여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경유의 과정을 독자로서 되짚어 추론하길 좋아한다. '이 문장은 이런 느낌에서 쓰였겠지….' 그런데 이 추론엔 정답이 없다. 오직 추론의 과정만 반복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언어세계가 무한대로 넓어진다. 나에게 내재돼 있지만 마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던 느낌들이 시인의 언어를 빌려 정확히 명명된다. 이것은 (적어도 내겐) 거의 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의 '시인의 말' 모음집인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은 완벽한 책이었다. 시인의 말도 독자가 그것을 시로 향유한다면 시니까. 무려 시집 맨 앞장에 배치되는 특별한.
책 속 송승환 시인은 "나는 있는다"라는 아주 짧은 진술로 '시인의 말'을 마친다. 반대로 박상수 시인은 진술 없이 이미지만을 나열한다.
"가시엉겅퀴즙 / (…) / 코코넛 파우더 // 샤라랑 / 샤라랑".
이 가운데 이현호 시인의 '시인의 말'이 있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 / 그다음은 세계 // 그 하나 둘 세계를 / 네게".
이 문장엔 진술과 묘사, 리듬과 라임이 거의 다 있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라는 진술, "하나 둘" 수를 셀 때의 리듬, "세계를/네게"라고 말할 때의 라임, 그리고 그 모든 게 모여 하나의 '시인의 말'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선물처럼 당도하는 이미지.
그 이미지는 내게 '이 시집으로 네게 내 세계 전부를 주겠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하나의 가슴에 둘의 심장이 뛴다"는 건, '나'에게 '너'만을 위해 뛰는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는 말. 이렇게 로맨틱하게 해석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의 추론이다.(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생각의 공간(허정원 지음, 북스톤, 2024)
디자인은 이제 디자이너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든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을 만드는 것일까? 혹은 일상에서 어떻게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받는 것일까?
나는 많은 디자이너를 만나왔다. 그중에는 괴팍하고, 특이한 디자이너도 있었고, 이상한 디자이너도 있었다. 예를 들면,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디자이너 중에는 좋은 디자이너, 나쁜 디자이너, 이상한 디자이너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두 주인공이다. 나름대로 모두 매력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세상을 움직인다.
이 책의 저자는 좋은 디자이너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선한 마음을 가진 디자이너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표정과 말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대기업의 크리에이티브 센터장이다. 소위 임원이란 말이다. 임원과 디자이너라는 경계가 쉽게 연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직급이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보는 시선을 가지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질문하는 디자이너, 5번의 Why 사용법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와 기억에 관한 내용도 인상 깊었다. 디자이너의 언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좋은 디자인이 어떻게 사람들과 공명하게 되는지, 그 순간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렇게 디자이너가 자신의 삶 속에 드러나는 디자인의 솔직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보통 디자이너들은 후까시가 있다. 그럴듯해 보이게 해야 하는 점 때문에, 사실 엉뚱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의 속사정을 공개할 수 없다. 그러나 허정원 디자이너의 글에는 디자이너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일상을 어떻게 돌아보고, 다른 관점을 가지는지, 부드러운 그의 글 속에서 디자이너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잔잔하게 읽어가게 되는 이 책은, 디자이너의 일상을 엿보는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디자이너가 생각을 굴리고 다루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열어봐야 할 것이다.(백희성/KEAB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작가)
■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장인용 지음, 그래도봄, 2025)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이라는 부제가 매혹적인 이 책은 우리말 단어들의 뜻과 의미, 변화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장인용 작가는 출판인으로서 평생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원에 관해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말에 새겨진 흔적과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늘 흥미로웠단다. 책 구석구석에서 그런 저자의 신명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때론 놀이에 열중하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읽을 때다.
"속된 말로 ‘달라붙어 성가시게 하는 것’을 ‘개기다’라고 한다. ‘개기다’의 원형은 ‘개개다’이고, 그 뜻은 ‘맞닿아 해지거나 닳다’이다. 기본적인 뜻은 변하지 않았지만 활용은 전혀 다르다. ‘개개다’는 맞닿은 쌍방이 모두 원인이고 결과도 동일하나, ‘개기다’는 일방적인 형태이다." (96~97P)
오랫동안 우리 말과 지식과 독자를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쉽게 읽히지만, 대체 이걸 어떻게 썼을까 궁금해진다. 수많은 단어의 어원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추적하고 확인해야 했을 것이고, 그러니 쓰는데 얼마나 어마어마한 공이 들어갔을까. 읽다 보면 저자의 노고가 자체로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과 유익함을 모두 갖춘 보석 같은 책이다.(김성신/출판평론가, 비평연대 가디언즈)
■ 영화처럼 걷고 여행처럼 찍다(김문경 지음, 사유와공감, 2025)
여행기를 잘 읽지 않는 이유는 즉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친 일상의 짐을 벗어던지고 새롭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것, 분명 좋을 텐데, 나는 지금 떠날 수 없다... 그럼 애가 타서 어쩌지? 나는 여행에서만큼은, 간접 경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배고플 때 '먹방'을 보며 주린 배를 달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영화 속 장소로 떠나는 여행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행자가 젊은 시네필 감독이라면 더더욱. 독립영화 '정직한 사람들'로 입봉한 김문경 감독은 영화를 사랑하고 직접 만들다 못해 여행마저도 영화 속으로 떠났다. '중경삼림', '런치박스', '리스본행 야간열차' 등 아끼는 영화에 나온 풍경을 직접 걷기 위해 서른네 개 나라로 향한 것이다. 나에게는 그 여정 하나하나가 영화를 향한 사랑 고백으로 보였다.
도시마다 고유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색'이 있다. 김문경 감독은 그 '색'을 책에 실린 사진들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신인 작가답게 거침없는 듯하면서도 섬세한 문장도 매력적이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쿠바 재즈, 스페인의 타오르는 강렬함, 포르투갈의 느긋함을 그려낸 문장을 읽으며 직접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이것으로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갑게 읽을 책이다. 다만 일단 책을 펼치면 그 안에 소개된 영화들까지 모조리 보고 싶어지니, 주말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