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치열한 삶의 내면을 감각하는 시간...‘불멸의 화가 반 고흐展’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2007년과 2012년에 이어 12년 만에 개최된 화가 반 고흐 작품 전시회 - 반 고흐 작품의 최대 소장처인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단일 컬렉션 - 연대기적 테마에 맞춘 원화 76점 전시

2025-06-25     주하영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10년이란 세월은 한 사람의 업적을 길이 남기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부족한 시간일까?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을 찾기 위해 방황한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듯, 10년의 세월을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해 불태운 사람이 남긴 무언가를 보는 일은 감동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순교자의 삶을 택하거나 영웅적 행위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민중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 순풍에 돛 단 듯 성공에 이르는 것보다는 환멸에도 무너지지 않고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인식했던 사람,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을 남기고 싶었던 사람, 자취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무한한 애정과 매력을 느꼈던 사람….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던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가슴에 총상을 입고 귀가해 사경을 헤매다 29일 새벽 두 눈을 감았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을 남긴 작가”이자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리는 거장 반 고흐의 10년간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의 나이 27세가 되던 1880년부터 1990년까지 900여 점의 회화와 1,100개의 스케치를 남긴 열정의 소유자가 품었던 고뇌와 방황, 절망은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 속에 기록되고 남겨졌다.

자신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던 생각과 감정들을 늘 편지에 쏟아내곤 했던 반 고흐가 실제로 쓴 편지는 2,000통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보존된 편지들은 총 903통이며, 그 가운데 663통의 편지의 수신인이 동생 ‘테오(Theo van Gogh)’로 되어 있다.

반 고흐는 자신의 지지자이자 후원자, 영혼의 동반자와도 같았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작업 중인 그림에 대한 스케치와 아이디어, 설명들을 쏟아냈고, ‘스크래치(scratches)’라고 불렀다.

최근 대전시립미술관에서는 화가 반 고흐 작품의 최대 소장처로 알려진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Kröller-Müller Museum)의 단일 컬렉션으로 엄선된 원화 76점을 선보인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의 막이 내렸다.

반 고흐의 10년간의 치열한 창작 활동 기간을 머물렀던 곳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나눠, 작품 스타일의 변천 과정과 노력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된 전시였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展은 지난해 11월 29일부터 2025년 3월 1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 데 이어, 3월 25일부터 6월 22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2025 세계유명미술특별전’으로 지속된 대장정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관람객이 몰리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번 반 고흐 작품 전시는 2007년 첫 국내 전시를 시작으로 2012년에 '반 고흐 in 파리' 이후, 12년 만에 세 번째로 한국 관람객들을 만나는 기회였다.

2025 ‘불멸의 화가 반 고흐’展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자화상’, ‘착한 사마리아인’,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을 포함한 반 고흐의 작품들을 네덜란드 시기(1881-1885)부터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까지, 총 5개의 챕터로 나눠 시대별로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반 고흐의 유명 작품들보다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화가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화풍의 변화를 추구했는지, 변천사의 과정을 따라가는 데 의미가 있었던 이번 전시는, 1938년에 설립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소장품이 주를 이루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 관장인 벤노 템펠은 도록의 인사말을 통해, 현재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의 회화 90여 점과 드로잉 200여 점 가운데 이번 전시에 반 고흐의 그림 39점을 포함한 76점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템펠은 “반 고흐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본 전시의 총감독인 서순주 역시 도록의 서문을 통해, “어두운 톤에서 밝은 톤으로 변화해 가는 작품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또, 작품마다 작가의 정신적 심리상태와 시대적 배경에 관한 설명을 부여해, “반 고흐의 예술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고 피력했다.

1869년, 숙부의 도움으로 16세의 나이에 구필 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일하게 된 반 고흐는 1873년에 새로 설립된 구필 화랑의 런던 지점으로 옮기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성장한다.

하지만 1875년 파리의 본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는 점에 분개하고 예술을 판매하는 직업에 회의를 느낀 반 고흐는, 상사를 비롯한 고객들과 갈등을 겪던 끝에 1876년 해고되고 만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지만 시험에 실패하고, 벨기에 보리나주에 위치한 광산에서 선교사로 일한다. 하지만 자신의 빵과 집을 내어주고 비참한 지경에 이를 정도로 광부들의 삶에 몰입한 반 고흐의 선교 활동은 단체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그는 또다시 해고된다.

1880년 3월, 집으로 돌아온 반 고흐는 불안한 미래를 염려하는 편지를 동생 테오에게 보내고, 광부들의 삶을 소묘로 그려 넣은 편지를 받은 테오는 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볼 것을 제안한다.

1880년 여름 즈음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한 반 고흐가 첫 유화 작품을 완성한 1881년부터 1885년까지의 ‘네덜란드 시기’는 화가로서의 입문 과정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반 고흐 작품들은 어두운 색채를 사용하며 지역 풍경과 가난한 농민들의 일상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한 특징이 있다. 헤이그 화파(Hague School)의 수장이자 사촌의 남편이기도 한 안톤 마우베(Anton Mauve)로부터 18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은 영향 때문이다.

1884년, 복잡한 직조기 한가운데에 방직공이 앉아 있는 풍경을 펜으로 그리는 일에 매료된 반 고흐는 베틀이 찍어내는 무늬와 색의 조화를 바라보면서 색채에 큰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유화로 완성된 '직기와 직조공'은 반 고흐가 “베틀이 덜컥거리고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까지 그려 넣고 싶어 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의 그림에 상당히 비판적이고 좀처럼 만족하는 법이 없던 반 고흐가 마음에 들어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땀 흘리며 힘들게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네덜란드 시기 작품들에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여러 개의 이삭 더미가 묶여 있는 들판이나 밀단을 묶고 있는 인물들이 자주 발견되는데, 황금빛 밀밭은 반 고흐가 보다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 아를과 생레미 시기에 수십 점을 그릴 정도로 좋아한 풍경이었다.

농민의 고단한 삶을 자주 그린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를 존경하고 “느끼는 대로” 그릴 것을 강조하는 그의 인물 재현 방식을 따르고자 했던 반 고흐는, 당대의 미술 아카데미가 요구했던 해부학적 비율에 맞는 인물들을 그리지 않았다.

1885년 4월에 완성된 '감자 먹는 사람들'은 지인들의 혹독한 비판에 노출되며 반 고흐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겨준다. 그는 농부들이 정직하게 노동한 결과물이자 수확물인 감자를 열심히 일한 손으로 먹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싶어 했지만, 테오를 포함한 그 누구도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반 고흐가 5년 동안 긴밀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림에 대한 의견을 나눴던 동료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Anthon van Rappard)는 “비현실적인 주전자와 부자연스러운 손”을 지적했을 뿐 아니라, 인물들의 신체 비율에 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1886년 3월, 파리에 도착한 반 고흐는 2년간 테오의 집에 머물며 툴루즈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 조르주 쇠라, 폴 고갱과 같은 다른 화가들과 친분을 쌓고, 밝은 톤의 색채로 변화를 시도한다. 1886년부터 1888년에 이르는 ‘파리 시기’의 꽃 그림들은 “화면의 배색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서 비롯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시기에 반 고흐는, 인상주의 이전 세대의 프랑스 화가인 아돌프 몽티셀리(Adolphe Monticelli)의 강렬하고 열정적인 색채와 동적인 느낌, 물감을 두텁게 발라 입체감을 강조하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터득해 적용하기 시작한다.

1886년 여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들꽃과 장미가 있는 정물'의 경우, 화려하고 풍성한 꽃의 표현이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술사학자 얀 홀스커(Jan-Hulsker)에 의하면 네덜란드 시기와 많이 달라진 반 고흐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한다.

겨울에는 꽃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빠른 속도로 그려진 꽃 그림들은 파란색과 흰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다채롭고 화려한 색상의 강렬한 대비와 붓 터치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도록에 따르면, 1887년 6월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파란 꽃병에 담긴 꽃들'의 경우, 전통적인 꽃 정물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지만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를 넘어선 반 고흐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확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이네, 안데르센, 롱펠로, 엘리엇, 번연, 디킨스, 모파상, 졸라 등 다독의 문학적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던 반 고흐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그리곤 했는데, '석고상이 있는 정물'에는 공쿠르 형제의 소설과 모파상의 소설이 등장한다.

하층민의 삶을 병리학적으로 조명하고, 사회 고발적 날선 비판과 허위의식의 폭로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화폭에 담은 것은 반 고흐가 자연주의 작가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제르미니 라세르퇴'와 '벨 아미'는 반 고흐가 누이인 빌(Wilhelmina)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삶을 진실하게 묘사한 걸작들로 추천한 소설들이기도 하다.

1888년 2월, 반 고흐는 파리의 추운 겨울 날씨를 벗어나 빛과 색이 더 풍부한 남쪽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출한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풀밭으로 도망가고 싶어 기를 쓰는 낡아빠진 파리 마차의 말과 같다”고 묘사하는데, 실제로 곧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에 도착한다.

‘아를 시기’는 반 고흐가 뜨거운 태양이 품은 강렬한 색을 활용하고, 밤의 아름다움, 인물화와 풍경화를 많이 생산하며, 약 15개월 동안 200여 점을 남긴 정점의 시기이다.

독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책을 읽고 난 뒤, 예술가 공동체를 세우고픈 반 고흐의 야심이 더 커진 때이기도 한데, 고갱과 함께 ‘노란 집’에서 머물게 되고 예술적 교류와 발전을 꿈꿨으나, 크게 갈등을 겪으면서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반 고흐의 대표작 ‘해바라기’ 시리즈는 화가들의 공동 화실 구현을 위한 ‘노란 집’을 장식하고 꾸미기 위해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아를에서도 여전히 반 고흐는 농촌 생활을 그리는 화가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1888년 6월에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의 유화 작업에서 색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열정적으로 토로한다.

화가 밀레의 1850년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을 변형해서 모사한 반 고흐의 그림들은 이미 30여 점이나 있었지만, 그는 새로운 그림이 “색을 통한 감정적 표현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편지에서 풍부한 색으로 크게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것이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서, “하늘은 진노랑의 태양처럼 밝고, 씨 뿌리는 사람의 옷은 파랗지만, 땅은 노랑에 보라를 섞은 중간 색조로 노란 붓질을 많이 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실제 색상이 어떻든 상관없다”면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머릿속에 그려보는 절대로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일지 모른다는 점을 피력한다.

하지만 반 고흐는 끝내 유화로 그린 자신의 이 새로운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스스로 ‘실패작’으로 평가했다. 살아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반 고흐는 “예술가들이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현실에 대해 불만을 자주 토로했다.

항상 “민중의 눈”을 그리고 싶어 했던 그는 모델을 구할 돈이 부족해 인물화에 전념하는 대신 꽃을 그리거나 자신을 그리곤 했다. 반 고흐의 자화상이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으로 그린 초상에는 그 자체의 생명력, 즉 화가의 혼에서 곧장 튀어나오고 어떤 기계도 접근할 수 없는 생명력이 있다”고 여겼고, 사진이 드러낼 수 없는 ‘영혼’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술평론가 헨드릭 브레머(Hendrik Bremmer)는 1887년 4월-6월에 완성한 ‘자화상’을 반 고흐의 “천재성이 드러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브레머는 이 자화상에 대해 반 고흐가 “자신을 상대로 자세한 분석과 연구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전체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총 36점의 자화상 중 파리 시기에만 약 25개의 자화상이 그려졌는데, 아를 시기에는 반 고흐가 고갱에게 선물한 자화상(1888)과 귀를 자른 탓에 붕대를 감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자화상(1889)이 유명하다.

반 고흐의 발작 증상은 고갱과의 사건 이후 반복적으로 발생하는데, 1889년부터 1890년에 이르는 ‘생레미 시기’에 반 고흐는 정신적 고통으로 분투하면서도 창작을 계속해 나간다.

“많은 화가들이 미쳐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예술을 생산하기 시작한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반 고흐는 구원과 영혼의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들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그는 심각한 발작으로 하루의 4분의 1을 그림을 그릴 수 없던 때에도 발작이 멈춘 사이에 감시를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에 있는 소나무와 협곡, 붓꽃을 그린 반 고흐는 1890년 5월,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1849년 작품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작을 완성한다.

청보라색 바위와 노란색이 두드러지고 구불거리는 선과 짧은 터치의 붓놀림이 인상적인 그림에 대해, 반 고흐는 “고대 목판화와 같이 선이 왜곡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점점 더 길게 지속되는 발작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 두려움으로 낙담하면서도 그림 그릴 능력이 아예 사라질까 봐 더욱 맹렬히 작업하고자 했던 반 고흐는,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판화 모작 뿐 아니라 자신이 그렸던 옛 인물들의 데생들도 다시 그렸다.

'슬픔에 잠긴 노인'은 1882년에 만든 석판화 '영원의 문에서'를 수정해 유화로 완성한 작품이다. 피로에 지친 노인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 왠지 반 고흐의 자화상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덧없는 것에서 영원을 추구하고, 변함없이 내면을 갈고닦기 위해 노력하며, 진정성 있는 예술을 선보이고자 했던 화가로서의 삶, 그리고 세상에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겨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친 한 사람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은 그가 다가올 가까운 미래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890년 5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한 반 고흐는 3일 만에 4개의 그림과 2개의 드로잉을 완성한다. ‘오베르 시기’라고 불리는 70일 동안 반 고흐는 80여 점의 유화를 완성했다.

'꽃이 핀 밤나무', '가셰 박사의 초상'을 포함해 오베르의 곳곳을 담은 그림들은 “인간이란 토탄 덩어리가 아니며, 다락방에 처박혀 잊힌 채로 견딜 수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반 고흐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하다.

1890년 6월, 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반 고흐는 “내가 지금 아는 것을 십 년 만 더 젊었을 때 알았다면, 얼마나 더 야심적으로 작업을 했을까”라고 토로했다. “그림을 그릴 때만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던 그에게 10년은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안타깝고 모자란 시간이었던 셈이다.

한 사람의 삶을 그가 남긴 그림들로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도록 만들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고자 열망했던 화가의 작품을 보는 일은, 900통에 이르는 편지로 쏟아낸 그의 삶을 읽는 것보다 더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평생 영혼과 구원을 추구한 화가의 내면에 숨 쉬던 아름다움과 고통, 슬픔과 아픔, 절망과 희망을 느끼기에 혼신의 힘을 쏟아 완성한 그림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을까? “100년 뒤에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초상”을 추구했던 화가 반 고흐의 업적은 후세의 관람객들에게도 여전히 그의 삶을 감각하게 만들며, 영원한 불멸의 가치를 이어가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