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1) 정몽주 묘에서 이방원을 보다
세상은 풍경이다. 풍경은 사람과 상관없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과 눈길과 마음길이 닿으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온 풍경은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역사가 된다. 28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다 ‘100세 시대의 작가’로 변신한 홍찬선 시인이 발품 팔아 얻은 풍경을 시로 풀어 독자들을 찾아간다. ‘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은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생각을 줄 것이다. <편집자주>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경기도 용인에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묘에 가면 생각이 많다.
우선 포은의 묘 입구에 세워진 ‘단심가비’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단심가'는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넷째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하여가'를 지어 포은에게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자고 권유했을 때, 거부의 뜻을 확실히 밝힌 시조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전문.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전문.
저물어 가는 고려를 부흥시키려고 죽음을 마다한 포은의 충절을 읽을 수 있다.
세종(世宗, 1397~1450)은 “포은은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고 평했다.
목은 이색은 “학문이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고 한 것에 비해 매우 긍정적이다.
그런 포은이 이성계를 따라 조선건국에 나섰다면 조선은 좀더 나아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포은의 묘로 향한다. 포은의 묘는 순절(殉節) 직후 개성의 풍덕군에 썼다가 태종 6년(1406)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했다.
이때 이장 행렬이 용인시 풍덕천리에 이르자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 묘소 자리에 떨어졌고,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곳에 묘를 썼는데,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묘 앞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다. 포은의 묘 앞에서 시 한 수를 가슴에 적었다.
그날도 이렇게
하늘이 가슴 저리도록 파랬을 것이다
쇠몽둥이를 맞고
빨간 피 분수처럼 솟아 선죽교를 발갛게 적시며 시내되어 흐를 때
하늘도 말 없이
시퍼렇게 멍들었을 것이다
개성에서 영천까지는 너무 멀어
아니 포은의 시신을 맞이한 고향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두려워
바람에 날린 명정이 떨어진 곳
이곳이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었다
오늘도 머리맡에선 해가
그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던 해가
발갛게 떠오르고
그날 호곡하듯 초혼가 불렀던 까치가
하얗게 피어나는 연꽃을 맞이했다
- 홍찬선, '정몽주 묘에서' 전문.
정말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이었다. 까치와 연꽃의 추임새를 받으며 내려오자 포은의 어머니가 포은에게 주었다는 시조 '백로가'가 반겨주었다. 그야말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포은 어머니, <백로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