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노인과 바다' 배우 박정순, 노인 어부 그 자체였던 '빛나는 아우라'

- 헤밍웨이 원작 극화...상상력 기발한 김진만 각색과 연출

2025-06-0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극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2인극의 베테랑 김진만이 각색 연출하고, 노인 어부 그 자체 같은 박정순 배우의 사람냄새 풍기는 연기, 거창하게 꾸미지 않아도 조명 음악(음향), 소품과 스모그만으로 망망한 바다의 일엽편주를 만드는 상상력...

극단 앙상블이 서울연극제 자유공연작으로 대학로 드림시어터에서 8일까지 공연 중인 헤밍웨이 원작의 '노인과 바다'는 어떻게 소설을 이처럼 생생하게 공연화했을까, 감탄케 할 만큼 기발한 연극이다. 물 한 방울 없는 무대에서 갈매기가 날고 돌고래가 튀어 오르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지고, 사투 끝에 잡은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상어떼 공격으로 뜯어먹히고 쓸쓸히 항구로 돌아오는 노인의 뒷모습에 연민이 느껴질만큼 실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김진만 연출은 월드 2인극 페스티벌을 창안해 성공적으로 이끌어오는 조직력과 기획력이 있을 뿐 아니라 각색과 연출도 뛰어나다. 필자는 수년 전 그가 연출한 2인극 '씨름사절단'을 보며 발랄하다고 느꼈는데, 이번 '노인과 바다'를 보고 상상력과 기운이 일맥상통함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는 2인극만이 지니는 팽팽한 긴장감과 재미에 역점을 두고, 어떤 어려운 소재라도 이해하기 쉽게 극화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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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이다. 고전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요즘 세대에게 이처럼 상상력과 배우의 연기만으로 감동을 주는 무대야말로 연극의 본령이고 명작의 향기를 공유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제목의 공연을 영상과 무빙 등으로 만든 버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김진만의 '노인과 바다'는 아날로그를 고집해 더욱 투박하지만 손때 묻은 아우라를 느끼게 했다.

김진만 각색의 '노인과 바다'에는 그간 많은 배우들이 역할을 맡아왔다는데, 필자는 새로 투입된 박정순-박준석 콤비의 첫 공을 선택했다. 연습 후 첫 무대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배우의 호흡이 잘 맞았고, 특히 구세대의 노련미와 원숙함, 신세대의 청순함과 진솔성이 잘 조화되어 청소년부터 중장년까지 폭넓은 관객층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 또한 이 연극의 매력이다.

박정순 배우는 오랜 세월 무대에 서오며 진솔한 캐릭터로 정평을 얻고 있는 연기파 배우지만, 이번 '노인과 바다'에서는 아우라가 노인 어부 그 자체였다.

등장만으로 노인의 고독이 느껴졌다. 그는 몸을 많이 쓰는 고난도 연기도 얼굴 표정과 화술로 소화해 작품에 몰입하게 했다. 고기 못 잡는다는 비아냥을 묵묵히 참아내며 마침내 고군분투 끝에 낚은 청새치를 상어떼 공격으로 잃었음에도 일상처럼 돛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그의 처진 어깨와 거친 손에서 인간적 연민이 묻어났다. 연륜이 깊은 박정순 배우는 헤밍웨이가 묘사한 노인의 집념, 강인함, 고독과 허탈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표출했다.

또 하나의 발견은 청년 역 박준석 배우이다.

그의 커리어는 잘 모르지만 초연 무대임에도 해설부터 노인의 친구, 조력자, 소도구와 상황 묘사에 이르는 다양한 멀티 역할을 마임과 연기로 신선하게 해냈다.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지만 그의 역할은 극 전체를 소통케 할 뿐 아니라 노인 역 박정순의 존재를 빛나게 해주었고, 관객들에게는 친절한 가이드로서 작품의 이해를 도왔다. 작은 새의 날갯짓에서 사자의 포효까지 몸으로 표현하면서, 현장 관객을 극 속에 끌어들이는 그의 캐릭터가 헤밍웨이 명작을 공연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진만 각색 연출의 '노인과 바다'는 2인극인데도 진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요즘 무대에서 잘 쓰이지 않는 스모그에 조명을 비춰 바다의 풍랑을 연상케 한 장면들도 좋았고, 수동으로 배를 돌려 위기 상황을 연출한 기법도 실감을 안겨주었다. 수작업으로 만든 청새치가 살을 뜯어먹혀 피투성이처럼 보이게 한 소품 활용도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바다에서 사투하는 노인의 심리와 신념, 행동을 소년이 중계 방송하듯 하는 방식으로 원작 소설을 입체적으로 다이제스트 해주는 이 같은 수공업적 작품은 어린이와 청소년층에 더 널리 보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