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천년 사찰 ‘화엄사’의 밤 밝힌 최종원 공간연출 디자이너
- 재능 기부로 시작한 화엄사 ‘공간 조명 프로젝트’ - 1년간 사찰에 머물며 완성한 '빛의 향연'..."일종의 수행 같은 과정이었죠" - 인공적 연출 지양..."건축물 본연의 색 잃지 않도록 자연의 결 존중" - 입소문 타고 '봉은사의 명상조명길', 대광사 ‘부처의 정원’ 프로젝트 기획 - '사찰 조명 전문가'로 인생 2막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 최종원(59) 공간연출 디자이너는 요즘 하루 대부분 시간을 사찰에서 보낸다. 사찰의 밤을 밝히는 조명 예술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그의 머릿속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2022년 전남 구례군 소재의 천년 사찰 화엄사에 1년을 기거하며 이른바 ‘공간 조명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조명 디자인부터 색감 선정, 설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업이 없다.
최종원 공간연출 디자이너는 “1년여의 세월 동안 수십 차례의 현장 조정과 시뮬레이션, 사찰 내 외부와의 소통을 거쳐 완성된, 일종의 수행 같은 과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실력이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 사찰에서 러브콜도 이어졌다. 올해 초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의 ‘명상조명길’을 기획한 데 이어, 현재 성남 분당의 대광사에서 ‘부처의 정원’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홍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시각 예술, 무대 예술, 공간기획 등을 아우르는 아트 디렉터로 활동해왔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비롯해 에든버러 페스티벌, 아비뇽 페스티벌 등 국내외 굵직한 행사에서 아트&테크니컬 디렉터로 활약했으며, 라스베이거스 아트페어와 싱가포르 아트페어에서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이 같은 화려한 이력을 내려놓고 그는 재능 봉사로 이번 사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좋은 일 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돈 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고 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사니 행복합니다. 하하.”
화엄사, 천년의 고요 위에 스며든 빛의 철학
- 화엄사 ‘공간 조명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사찰과 연이 있던 지인의 소개로 제안이 왔다. 주지 스님 역시 믿고 맡겨주셨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당시 무대 설계, 특수 효과 등 시각 예술을 담당하고, 다양한 공간에서의 연출 작업에도 참여했지만, 사찰에서의 작업은 처음이다.
화엄사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사찰 명소아닌가. 야간에도 천년 고찰의 아름다운 야경을 방문객들이 만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가 기획됐다. 2022년 3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작업했다.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조명 설치 작업과 개보수 작업을 병행했다. 사실 머리만 안 깎았지 절밥 먹으며 수행자처럼 살았다. 하하."
- 1여 년간 화엄사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본다면.
"처음 사찰에 발을 내딛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시각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손댈 곳 없던 완벽한 천년 고찰의 모습이 놀라웠다. 나무와 식물 그리고 오래된 사찰을 좋아한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즐겁게 일하다 보니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해졌다. 돈보다 더 큰 재산을 얻었다."
- 방문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뜨거웠다. 하하. 방문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연신 사진을 찍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토존이 생겼다. 작업이 야외에서 이뤄지다 보니 기후의 영향을 받아 힘든 적도 많았는데, 그간 애써왔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아 뿌듯했다. 단순히 공간을 밝히고 보는 것을 넘어서 ‘느껴지는 빛’을 담고 싶었는데, 그 진심이 전해진 것 같더라. 낮에 이어 밤까지 이어지는 사찰의 빛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
- 조명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화엄사는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전통사찰이기에 문화재청의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적용받는다. 특히 식생보호와 화재 안전 등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시각적 화려함이나 인공적인 연출은 지양했다.
천년이 넘은 고건축 사찰이고 건축의 외부재질을 고려해 사찰 건축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빛의 각도와 톤 조절 등 건축물과 빛의 융합에 집중해 작업했다.
직접적인 광원을 피하고, 조명은 식물에 닿지 않도록 각도를 조절하는 등 식생보호는 물론 화재로부터의 안전까지 고려했다. 내게 조명은 단기간의 설치물이 아니다. 불교의 감성을 기술로 만든 명상과 같은 존재다."
최종원 아트 디렉터는 “야외 작업은 땅, 식물, 기후의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작업 역시 사찰과 호흡하며 자연의 결을 고려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나무의 줄기와 잎, 사찰의 고건축들이 그 본연의 색을 잃지 않도록 ‘빛이 닿아야 할 곳’보다 ‘닿지 않아야 할 곳’을 고민했다. 조명기구는 가능한 한 시야에서 배제되었고, 빛의 각도는 사람의 시선과 사찰의 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수차례 조정했다.
색채 또한 최소한으로 정제해서 표현했다. 베이지와 화이트 톤으로 통일된 빛은 사찰의 목재 색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인공조명 특유의 날카로이 아닌 은은함이 공간을 감싸도록 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의 모습을 있게 한다’는 그의 공간 연출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빛은 침묵을 깨우고, 정원은 마음을 비춘다
- 봉은사의 '명상조명길' 기획에도 참여했다는데.
"화엄사에서의 작업이 끝난 후 좋은 평가를 받아서인지, 스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나보더라. 하하. 봉은사 역시 스님이 추천해 주셔서 참여하게 됐다. 기존 명상길에 명상 콘셉트의 조명을 더했으며, 시민들이 편하게 QR코드를 찍으면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기존 조성된 명상길이 어둡고 조명이 낙후되다 보니 안정성도 고려했다. 빛의 시각적 각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 현재 대광사에서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가. 절에서 기거 중인가?
"집에서 멀지 않아 사찰을 오가며 작업 중이다. 현재 ‘부처의 정원’을 조성 중이다. 대광사는 동양 최대 규모의 목조 건축물인 '미륵보전'으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불교의 철학과 예술이 결합한 공간으로 방문객이 자연과 함께 명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해 진행 중이다. 경혜 주지 스님의 '생활 불교' 철학이 반영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사찰에서 식물과 물, 옹기, 빛, 소리 등 자연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작업하고 있다. 사계절 약용 식물정원, 옹기 미디어아트갤러리, 명상조명길, 미륵보전 미디어파사드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무엇보다도 조명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빛과 관련된 시각적 작업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빛을 융합해 입체적으로 다루는 작업이기에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재능 봉사로 사찰 프로젝트에 연이어 참여하고 있는데, 혹시 불교 신자인가?
"무교다. 사찰에 가면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다 온다. 그냥 사찰에 있는 것이 좋다."
- 수행자의 길을 고려해본 적은 있나.
"술과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쉽지 않을 것 같다. 하하."
- 그동안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업이 있다면.
"평창동계올림픽 때 설치 미술과 디지털미디어파사드 쇼를 위해 경포호수에 설치한 20m 벌룬이 강풍에 파괴되어 침수되어 아찔했던 적이 있다. 공간연출은 작업이 야외에서 이뤄지다 보니 기후에 민감하다. 당시 미디어파사드 쇼를 어렵게 치른 경험이 있다."
- 향후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지금은 사찰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 이곳에 멈춰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식물, 흙, 물을 재료 삼아 창조하는 예술인 '대지 예술'이란 장르를 이 몸이 땅에 묻힐 때까지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