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실력 있는 예술감독이 빚어낸 지역 극단의 개가(凱歌)...이성열 연출의 '화염(火焰)'
- 창단 35년 인천시립극단, 이성열 연출 '화염'...LG아트센터 서울서 공연 - 백색 4각 평면에 펼친 연출의 독창적 해석...자신감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창단 35년의 인천시립극단이 공연예술의 명당인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 올린 이성열 연출의 '화염(火焰·Incendies)'은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 없이 오롯이 단원들의 역량만으로 충격의 연극 한 편을 명당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역작이었다.
'그을린 사랑'이란 제목의 연극과 영화로 잘 알려진 와즈디 무아와디의 희곡을 해석한 이성열 연출의 역량이 뛰어났고, 배우들이 자신감 넘치게 당당히 연기했으며, 여기에 스태프들이 완전체를 만들어 주었다.
솔직히 지난해 4월 부평아트센터에서 '화염'을 공연한다고 했을 때 지역의 공립극단이 올리는 연례 공연으로 여기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번 LG아트센터 서울 공연 초청을 받았을 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데 이전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보았던 공연과 달리 백색 바닥의 4각형 텅빈 무대에서 180분간 펼쳐낸 이성열의 '화염'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칙칙하지 않았다.
동선이 사통팔달로 이어지게 매 장면을 심플하게 풀어내면서도 역동성을 지닌 생물체로 내달아 마침내 충격의 실체를 드러내는 연출 기법으로 복잡한 작품을 쉽게 이해시켰고, 여기에 장면마다의 미장셴을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평범한 오케스트라가 명장(마에스트로)의 영입으로 명연을 펼친 것처럼, 서울 무대에서 만난 인천시립의 공연은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필자는 인천시립극단 단원의 구성이나 면면을 알지 못하나 이번 무대를 통해 연령대가 고루 분포되어 있고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할 만한 개별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주인공 나왈 마르완의 60대를 연기한 정순미 배우의 노련미와 10대부터 40대까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보여준 황선화 배우의 패기가 무대 위에서 빛났다.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공증인 역 김현준 배우와 쌍둥이 딸 잔느 역의 이수정, 아들 시몽 역의 최재민 배우도 각기 수학 강사와 아마추어 복서로 개성을 보이며 안정된 연기로 무대를 이끌었다.
21명의 배우가 한 호흡으로 앙상블을 이뤘지만 나왈의 친구로 나와 진한 우정과 투쟁력을 보여준 사우다 역 송예은, 비극적 운명의 저격수 나하드 역 서창희, 실체를 풀어내는 대장 삼세딘 역의 최진영, 어머니 지한 역의 이신애, 할머니 나지라 역의 강주희, 연인 와합 역의 신정웅 배우의 연기가 돋보였다.
여기에 의자 배열 등 공간 구성으로 동선을 확장 시킨 이태섭의 무대미술, 백색의 무대 위에 세트 같은 공간감을 입체화시킨 김성구의 조명디자인, 중동인들의 복식을 현대적으로 간소화 한 오수현의 의상디자인, 그리고 현장에서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한 한응원 감독, 내전을 실감케 한 음향(이복행)과 영상(강경호)이 현장의 극적 아우라를 조성해 주었다.
'화염'은 레바논 땅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난민과 기독교 민병대 사이의 증오와 학살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끔찍한 수난사를 그려내고 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우리는 그 지역이나 민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교과서에서 조차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중동 소재인 이 연극을 통해 그들의 생활상과 신념 등을 엿볼 수 있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해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와즈디 무아와드는 증오가 빚어낸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중동인들의 삶과 사고도 동시에 보여준다.
필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의 가족사를 접했고 모계로 이어지는 3대의 여인들이 발휘한 삶의 지혜와 현실 적응력을 보았다. 나왈의 할머니는 나왈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어머니는 와합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아동시설로 피신시켰다. 나왈은 글을 배워 할머니 무덤에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웠고, 시설로 보내진 아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러다 내전에 휩쓸리고 감옥에 갇혀 성고문을 당해 쌍둥이를 낳았는데, 성고문한 당사자가 쌍둥이의 형이자 아버지라니...
연극은 그 수모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침묵'으로 일관하다 세상을 떠난 나왈의 유언 집행을 하는 과정을 통해 실체를 드러내게 했다. 이 과정에서 증오로 얼룩진 내전의 민낯이 보여지고 핏줄의 진한 연대 의식도 느끼게 해주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증오는 있을 수 없어.”
이 작품의 테마는 증오를 사랑으로 풀어낸다는 것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는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 보다는 진한 가족애,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침묵에서 깨닫는 고통의 실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벅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쌍둥이 딸 잔느가 숨소리 뿐인 녹음 테이프를 통해 엄마의 침묵을 느끼는 장면은 이 공연의 압권이다.
이성열 연출은 이 작품을 백색의 빈 공간에 벽돌 쌓듯 한켜 한켜 미징센을 구축해 충격적인 실체를 밝혀내는 극적 구성을 보여주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화염'을 희랍 비극 '오이디프스'에 비교하는데, 이성열 연출도 희랍 비극을 연상케 하는 늙은 나왈의 처절한 독백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이 작품에 전설처럼 들려오는 ‘노래하는 여자’는 실은 나왈의 절친인 사우다의 별칭이었는데, 나왈이 그 실체로 밝혀지는 것 역시 이 작품이 내세운 다성(多聲)의 화음이자 충격 포인트다.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게 나아질거야!”
가족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임을 증거하는 나왈의 이 대사는 증오를 사랑으로 풀어내는 키워드일 수 있으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 쉬울 수가 없었다.
이성열 연출은 프로그램에 실린 연출의 글 제목을 ‘123일의 기억’이라고 했다. 자난 겨울과 봄, 이 땅에 일렁였던 분노와 증오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우리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하면 어떤 참혹한 결과가 빚어지는지, 인천시립극단 단원들과 이성열 연출은 연극 '화염'으로 그 실체를 명징하게 드러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