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영화감독 백학기의 시네스토리] 한국 영화사에 전설로 남은 고전 명작

[내 가슴에 남아있는 한국고전영화와 그 배우들(1)] -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 나운규의 ‘아리랑’ - 韓 최초의 발성영화로 기록된 첫 유성영화 '춘향전'

2025-05-06     백학기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백학기 칼럼니스트 = 한국 영화사는 1919년 기미년 '의리적 구토'로 시작한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한 이래 조선에 입국해 있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활동사진'이란 명칭으로 알려진 '영화'.

당시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연쇄극으로 공연되던 '의리적 구토'에는 10분가량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움직이는 동영상의 모션 픽처인데, 이른바 연극 공연 도중 스크린을 걸치고 모션 픽처가 영사된 것이다.

1920년쯤으로 추정되는 19분 러닝타임의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이규설 감독)는 일제강점기 무성영화로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연출과 배우는 조선인이 담당했다. 후에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주인공 아버지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 이규설 감독의 작품인 '근로의 끝에는...'는 조선총독부가 근로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필름은 고무신 고치는 박순봉과 이웃 간인 나무 땔감 파는 김원보의 과장된 동작과 제스처가 화면 가득 넘쳐나는 찰리 채플린식 슬랩스틱 코미디물이다. 20분이 채 안 되는 이 영화는 촬영 기법 중 카메라 조리개가 중앙 화면부터 작아지고 커지는 이른바 아이리스 인(II), 아웃(IO) 기법을 사용하고, 포커스 아웃 기법 등을 구사하면서 모션 픽처(motion picture)라는 개념에 충실한 초창기 짧은 필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23년 조선총독부가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지원한 '월하의 맹서'(윤백남 감독)가 제작된다. 윤백남 감독은 '윤백남 푸로덕슌(프로덕션)'을 만들어 '심청전'(1925, 이경손 감독)과 이광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개척자'를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무성영화 시기다. 화면만 있고 사운드가 없는 스크린이 관객들의 시야에 펼쳐지므로 사운드 역할을 맡은 변사의 활약은 가히 최고였다. 관객들은 변사의 ‘해떤 거디였다~(했던 것이었다~)’에 울고 웃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10년 동안 무성영화는 전성기를 이룬다. 주지하듯 나운규 감독 주연의 '아리랑'(1926)은 무성영화 시기 대표작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리랑'은 식민지 시대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조선인의 울분과 비애를 다뤄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이어 나온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도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비애를 다뤄 유명해지는 등 무성영화 시대 모두 80여 편의 극영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필름들은 남아 있지 않다.

1935년 첫 유성영화는 '춘향전'(이명우 연출)이다. 이 작품 역시 남아 있지 않다. 이 해 10월 4일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의 제작으로,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춘향전'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발성영화로 기록된다.

이기세(李基世) 원작, 이구영 각색, 이명우(李明雨) 감독·촬영, 이필우(李弼雨) 녹음 및 현상과 조명으로 참여했다.

배역은 문예봉(文藝峰)·한일송(韓一松)·김연실·노재신(盧載信) 등이 맡았다. 이 영화의 기술 과정을 맡은 이필우는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최신 영화 기술을 배운 후 귀국하여, 카본 라이트를 전구 라이트 시스템으로 바꾸어서 100kW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상을 배트(vat)현상으로 하고, 프린터는 '벨 엘 호웰'을 사용하여, 이른바 기술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흥행 결과도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