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젊은 관객들의 뜨거운 기립 박수...신유청 연출의 ‘시련’
- 아서 밀러 작 ‘시련’...백색의 투명한 공간에 각인되어 가는 집단적 광기와 진실의 힘 - 배우 엄기준·강필석·남명렬·주호성·김수로·류인아·여승희 등 열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아서 밀러의 역작 ‘시련(The Crucible)’은 젊은 시절 희곡으로 읽으며 빠져들었던 명작이고 명배우들의 공연도 몇 차례 보아 익숙할 줄 알았는데, 신유청 연출의 버전은 전혀 새로웠고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기획사 공연에 뭔가 아쉬움을 느껴왔으나 이만한 무대 완성도는 일반 연극에서 구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025년 4월 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개막, 4월 27일 막을 내린 김수로 기획·신유청 연출의 ‘시련’은 연일 젊은 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몰입도와 호응도도 높았다.
필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의자에 등을 댈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 속에 펼쳐지는 무대 위의 상황에 완전 몰입해 관람했고, 마지막 한 개인의 양심적 결단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관계가 복잡하고 내용이 어려운 이 작품을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지닌 힘과 연출의 해석이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연초 국내 연극계를 달군 아서 밀러는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쓴 메카시즘 광기를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때문에 메시지가 분명하다. 거짓된 정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같은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신유청 연출은 희곡 서문에 작가가 쓴 “우리가 사는 시대에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의 본질을 비춰내 주기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옳음을 위해 무릎을 굽히지 않았던, 그래서 희생되었던, 그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며” 작품을 연출했다고 했다.
한마디로 축약하면 작가 아서 밀러와 함께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거울의 상처럼 무대 위에 명징하게 비쳐냈기에 관객과의 공감대가 넓었다고 본다.
그동안 국내에서 관람한 ‘시련’ 또는 ‘크르서블’은 사실적인 무대 세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신유청 연출 ‘시련’의 무대디자인은 이태섭이 맡았고, 그는 무대 전체를 ‘백색 큐브’로 설정했다. 외부와 차단되는 커다란 벽과 창이 있을 뿐인 백색의 공간에서 “추악한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군상의 유희”들을 적나라하게 투영시킨 것이다.
여기에 강지혜의 조명이 상황에 따라 검붉게 희게 푸르게 변하면서 관객의 심리를 자극시켰다. 사실감을 높인 의상(홍문기), 들릴 듯 말 듯 여운을 남긴 음악(지미 세르), 소품(노주연)들도 미니멀한 무대를 세련되게 받쳐주었다.
백색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더욱 적나라했고, 추호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신유청 연출의 ‘시련’을 관람하며 캐스팅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극의 중심 역할을 하는 존 프락터 역을 엄기준 강필석이 더블로 맡았고, 극을 이끄는 주요 배역을 패기 넘치는 중견 배우들로 포진시키면서 중진들이 이들을 받쳐주도록 균형을 맞춘 것이다.
필자는 4월 26일 엄기준(존 프락터), 박은석(패리스 목사), 박정복(해일 목사), 류인아(에비게일), 진지희(메어리), 김수로(토머스), 남명렬(댄포스), 주호성(자일즈), 김곽경희(레베카 너스) 등이 출연하는 무대를 관람했는데, 공연 후반이어서인지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웠고, 앙상블이 매끄러웠고 분위기도 무르익어 보기 좋았다.
세일럼의 존경받는 농부이자 클라이맥스에 양심선언을 하는 강직한 성격의 존 프락터 역을 맡은 엄기준은 TV와 뮤지컬 무대에서 인기 있는 배우로 정극에선 어떨까 했는데, 힘을 빼고 차분하게 감정을 억제하다가 마지막에 불같은 열정을 쏟아내는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전반부에서는 해일 목사 역을 맡은 박정복 배우의 활약이 돋보였다. 모든 배우가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착용했음에도 대사 전달이 애매한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이 배우의 발성은 생동감이 있으면서 대사 전달이 잘 되었다.
후반부의 스타는 단연 남명렬 배우였다. 마녀재판을 주도하는 부지사 겸 판사 역을 맡은 그는 체구와 연령대에 맞는 적역을 맡아 권위와 카리스마가 넘치는 댄포스 역을 맞춤형처럼 똑 부러지게 해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연극에는 주인공만 있지 않다. 감초 같은 조연도 있다. 이번 무대에서 세일럼 마을의 80세 넘은 농부 자일즈 코리 역을 맡은 주호성 배우는 특유의 화술과 유연한 연기로 말 그대로 ‘약방의 감초’같은 맛깔진 연기를 펼쳤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자기주장을 펴보지만 권력과 권위에 묻혀버리는 소시민의 자화상을 주호성 배우만큼 능청스럽게 해낼 배우는 흔치 않다고 본다.
이번 작품을 기획하고 마을의 유지인 토마스 역을 맡은 김수로 배우 또한 만능 배우로서 능글능글한 연기로 마녀사냥 와중에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졸부 캐릭터를 깔끔하게 펼쳐보였다.
커플 역을 맡은 배우들의 호흡도 잘 맞았다.
존 프락터 엄기준과 엘리자베스 프락터 여승희, 토머스 푸트넘 김수로와 앤 푸트넘 김도희, 그리고 커플은 아니지만 자일즈 코리 주호성과 마을의 존경받는 노부인 레베카 너스 역 김곽경희의 심도있는 연기도 눈길을 끌었다.
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젊은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도 극을 몰입케 하는 요소인데 젊은 배우들이 이를 온몸으로 해냈다. 특히 후반부 미친 듯 마녀 연기를 펼친 에비게일 역의 류인아,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메어리 워렌 역의 진지희, 패리스 목사의 노예인 티투바 역의 신혜옥 등이 제 몫을 해내 어묵한 무대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녀재판의 서기 이지키얼 치버 역의 허준호, 지역 판사 하쏜온 역의 오종훈, 집행관 해릭 역의 우범진, 그의 부관 홉킨스 역의 박세동, 그리고 다섯 명의 소녀들인 김예지(베티 패리스), 박인선(머시 루이스), 송민(수잔나 윌컷), 명시현, 류한나의 집단 연기도 빛을 발했다.
뮤지컬처럼 스펙타클하지도 않고 코미디처럼 재미있지도 않은, 진지하면서도 심각한 연극인 ‘시련’에 관객이 만원을 이루는 것은 희곡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만큼 힘이 있는 데다 연출도 세련되었고 배우들이 연기도 안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지만, 무엇보다 요즘의 한국이 처한 현실과 이 연극이 파고든 주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는 세상, 같이 있지만 조화를 잃어버린 세상, 참으로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그 혼탁한 시대에도 옳음을 위해 무릎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이 연극은 보여준다.
신유청 연출의 ‘시련’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스태프와 캐스팅이 대극장 무대에 맞게 탄탄하다는 점도 크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울림이 큰 원작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제대로 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