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식물의 발칙한 사생활 外
- [비평연대] 이솔림·황예린·배희주·김상화의 500자 서평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요즘 살 만해?"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은 게 언제였던가. 삶에는 항상 어려운 지점이 존재한다. 심지어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그렇다. "이만하면 살 만하다"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는 허탈함이 밀려오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별수 없이 계속해서 살아간다.
숨이 붙은 모든 이에게는 삶이 있다. 개중 어떤 삶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낄 만큼 살 만하지 않다. "살 만하지 못한데도 살아 있는 삶", 그 모순적인 삶을 논의하기 위해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가 만났다.
"살 만한 삶"에 대한 둘의 의견은 사뭇 다르다. 사람은 굶주림과 병듦 때문에도 죽지만 결핍과 우울 때문에 죽기도 한다고 보름스는 말한다. 그런 삶은, 비유하자면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다. 다른 한편에서 버틀러는 묻는다. 살 만한 삶은 누가 결정하는가? 왜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위태로워지는가?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삶의 수단을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살 만한 삶"을 이해하기 위해 두 사람은 속도감 있게 달려간다. 서로의 교차점과 충돌점을 확인하며 시원시원하게 나아가는 대담에서, 그들이 던진 결론 없는 질문들은 고스란히 독자의 몫이 된다. 그 질문에 답하다 보면 그동안 내 삶을 살 만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갈매나무, 2025)
내 삶 챙기기만 해도 머리 아픈데, 세상이 더 속 시끄럽게 하는 요즘이다. 복잡한 세상사엔 등지고 나의 행복에만 집중하려는 이들에게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는 단언한다. 그렇게 해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다.
철학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남들이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몰두해도 여전히 텅 빈 당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추어 낸다. 그는 우선 행복의 정의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곳이 아닌 ‘선(善)의 실천’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 사회가 되며 이기주의가 만연한 지금, 착한 것은 약하고 멍청한 것이란 생각이 통용되고 사회는 서로를 향한 미움만이 넘실거린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다정해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은 얼핏 듣기엔 동화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답게 세월을 초월하는 현자들의 오랜 지혜를 뒷배로 거침없이 사람들 마음속의 냉소와 불신을 깨부순다. 대신 그 자리에 ‘다정한 선의’를 매일 실천함으로써 나의 행복은 물론,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준다.
이미 세상은 나빠지고 있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 좌절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세상을 보며 느꼈던 염증의 고름을 짜내고, 다정함의 철학을 연고처럼 덧발라준다면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하루를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꺼이 ‘선해질 결심’을 다질 수 있길 바란다. (황예린/출판마케터·문화비평가·비평연대)
■ 식물의 발칙한 사생활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장은주 옮김, 문예춘추사, 2025)
수박은 왜 독특한 줄무늬를 가졌을까? 꽃의 꿀은 왜 깊숙이 숨겨져 있을까? '식물의 발칙한 사생활'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다양한 질문들에 식물의 시선으로 답하는 책이다.
편의점에는 손님이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도록 유도하는 왼쪽으로 돌아가는 법칙이 있다. 잘 팔리는 상품을 매장 안쪽에 배치할수록 손님이 다양한 상품을 보며 편의점을 둘러볼 수 있도록 돕는다. 꽃의 꿀 역시 곤충이 꽃가루를 충분히 묻히고 떠날 수 있도록 식물의 가장 안쪽에 있다. 인간과 식물이 비슷한 생존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다.
세계적인 농학 박사이자 식물학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다양한 식물들의 생존 방식을 흥미로운 사례와 함께 풀어낸다.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곤충이 좋아하는 꽃 색깔의 차이, 식물 줄기에 난 잎들의 위치와 온도의 차이점 등을 통해 치밀한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식물을 대하는 시선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한층 섬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한스미디어, 2019)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반전의 대가"로 불리는 일본 추리소설가 우타노 쇼고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나루세'가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자살하려던 여성 '사쿠라'를 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가 가진 수식어만큼 이 책은 스포일러를 피해 소개하기가 매우 어렵다. 완벽히 직조된 서술트릭이 책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다. 서술트릭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포일러 아니냐고? 그건 걱정 마시라. 알고도 속게 될 테니까. 가히 '반전의 대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책은 크게 2개의 서사로 구성된다. 하나는 '주인공 나루세와 나루세가 구한 여성 사쿠라가 서로를 알아가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나루세가 고교 후배의 부탁으로 어느 뺑소니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별개의 사건처럼 펼쳐지지만 그 별개의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서사로 얽혀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 즉 주인공이 사건의 '클루'를 찾게 되는 순간, 독자는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반전을 맞닥뜨린다. 우타노 쇼고식 서술트릭의 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사실 이 책은 표지가 풍기는 서정적인 느낌과는 많이 다른 책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우악스러운 첫 문장 "사정한 뒤에는 꼼짝도 하기 싫다.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밀려오는 졸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에서부터 독자는 '내가 책을 잘못 골랐나?' 싶게 된다. 나 역시 표지에 속아 낙화가 한창인 4월 중순, 이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가 뜨악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뜨악함'마저도 이 책이 수작인 이유라고. (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