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꼭 맞는 책·불가능한 애도外

- [비평연대] 김상화·배희주·백희성·이솔림·황예린의 500자 서평

2025-04-04     김리선 기자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권민경 외, 테오리아, 2022)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은 작가 10명이 저마다의 인생에 박힌 '첫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래 에세이집이다. 시인 셋, 소설가 셋, 작가 셋, 디자이너 한 명이 각자의 지난 시절을 독자에게 음악처럼 흘려보낸다. 이들의 왁자하거나 조용한 혹은 애달픈 유년 위에 배경처럼 깔리는 음악들을 '글로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존재하는 누구든 음악에 빚져 보지 않은 이 없겠다고.

이들이 말하는 첫 음악은 장르와 시대를 넘나든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불법 클래식 테이프에서 조악하게 흐르던 연주곡, 제주 바다를 보며 친구와 함께 녹음해 완성시킨 자작곡, 연인과 헤어지기 전 여행지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은 브릿팝, 오래 동경해 온 아이돌이 기념적으로 발매한 발라드 곡, 배달 일을 하던 아빠와 단 둘이 배송차 안에서 듣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까지. 각기 다른 이의 인생에 스민 음악이지만, 책을 덮고 나면 이 모든 곡은 '누군가의 추억'이라는 옷을 입고 독자인 내게 다시금 아로새겨진다. (모든 음악이 그러하듯) 하나의 이야기가 덧입혀진 음악은 이제 곧 시간의 더께를 통과해 또 다시 천천히 '나의 곡'이 될 테다.

나에게도 첫 음악이라고 할 만한 곡이 있다. 케렌 앤의 2004년 발매곡 'Not Going Anywhere'다. 이 노래는 12살쯤 내게 새겨졌다. 18년 전, 당시 아빠는 실직 상태로 일이 없었다. 그런 아빠 옆 조수석에 앉아 밤마다 식당에서 퇴근하는 엄마를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이 곡을 처음 들었다. 노래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고 아빠와 나는 낡은 탑차 안에서 가사를 따라 부르며 곧 퇴근할 엄마를 기다렸다. 속삭이듯 잔잔한 가수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기타 선율 아래 밤은 조용히 반짝거렸고, 나는 팝송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 시기, 나도 모르는 새 깨달았다.

음악은 늘 어두운 시기를 밝히는 첫 번째 등불이 된다. 뉴스를 틀면 무력해지는 요즘이지만, 힘든 시간을 통과 중인 모든 이에게 음악이 주는 사랑과 치유력을 잊지 말아 보자고 이 책을 건넨다. 저마다의 첫 음악을 떠올려 보며 오늘 하루를 버텨 보자고.(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


꼭 맞는 책(정지혜 지음, 유유, 2025)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은 항상 넘쳐나는데, 정작 나에게 딱 맞는 책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베스트셀러라길래, 다들 인생책이라고 해서 샀지만 막상 펼쳐보면 낯설고 어려워서 끝내 덮어버린 책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에게 꼭 맞는 책을 찾아야 할까?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는 저자 정지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책 처방사’다. 약국에 비유해 보자. 흔한 서평의 책 추천이 불특정 다수를 위한 자양강장제나 영양제 같은 거라면, 그의 책 처방은 ‘의사의 진료 후 처방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약’에 가깝다. 저자는 좋은 책을 어떻게 찾아내고, 읽은 책은 어떻게 기록하는 게 좋을지, 지난 8년 동안 책 처방사로 활동하며 터득한 자신만의 독서법을 풀어낸다.

책을 좋아하지만 정작 뭘 읽어야 할지 몰라 헤맸던 이들이라면 저자가 책 곳곳에 심어둔 그의 처방전을 한번 따라가 보길 바란다. 나아가 단순히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깊이 나아가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특별히 이 책을 권한다. 정지혜의 ‘꼭 맞는 책’은 책과 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는 유용한 안내서가 되리라고 믿는다.(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장소의 발견(조병규 지음, 쑬딴스북, 2025)

장소의

최근에 본 영화 ‘브루탈리스트’ 속, 거칠고 집요하게 자신의 이상향을 좇는 건축가 라즐리 토스를 떠올렸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의 저자 조병규는 너무도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다. 도전보다는 공감에, 이상보다는 삶의 숨결에 더 깊이 귀 기울이는, 다정하고 따뜻한 건축가.

조병규는 집을 설계하는 일을 ‘장소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공간을 나누고 계획하는 차원을 넘어, 누군가의 삶이 담기고 이야기가 머무는 그릇을 만드는 일.장소란, 우리가 살아낸 시간과 감정이 스며들어야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곳에나 ‘장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나무 아래 벤치, 아이와 함께 빵을 나눠 먹던 주방 창가,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골목 끝자락. 그 안에는 사건이 있고, 사람이 있고, 추억이 있다. 그래서 특별하다. 그래서 ‘장소’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아름답게 다듬어진 외형에서 오지 않는다고. 그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장소에서 내가 머무는 순간, 거기에 이야기가 생기고 감정이 겹겹이 쌓여간다고. 그렇게 우리는 공간을 사랑하게 되는 거라고.

책의 첫 장면부터 우리는 조심스레 펼쳐지는 한 통의 편지를 만난다. 건축주에게 건네는 인사의 말, 염려의 말, 기대의 말. 건축은 그렇게, 누군가를 향한 편지처럼 시작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조심스럽고 정직하다. 때로는 날 것이라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진심은 끝내 온기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감싼다.

그가 특히 아끼는 단어는 ‘시김’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고 시간이 더해지며 천천히 익어가는 상태. 막 지어진 건축물에선 느낄 수 없는, 삶이 배어드는 느림의 감각. 조병규는 건축이 끝난 후에도 건축주와 함께 그 시김을 쌓아간다. 그러니 그의 건축은 끝나지 않는다. 아니, 애써 끝내지 않는다.

‘장소의 발견’은 단순히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한 집의 마음을 쌓아가는 시간,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 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집을 짓고 싶은 사람에게, 건축가와 함께 진짜 ‘장소’를 만들어가고 싶은 이에게, 무엇보다 삶을 담은 공간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오래도록 당신 마음에 남을 것이다.(백희성/KEAB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작가·비평연대)

백희성

정원의 기쁨과 슬픔(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어크로스, 2025)

정원의

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마른 가지를 비집고 나오는 새잎과 꽃의 생명력은 매년 다시 봐도 경이롭다. 왜 정원이 '낙원'의 상징이 되었는지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런 정원이 사실 특권과 배제의 공간이었다면 어떨까? 정원 가꾸기의 매력에 푹 빠진 비평가 올리비아 랭은 그토록 사랑하는 정원의 문제적인 측면을 파고든다.

'실낙원'의 에덴 동산부터 정원을 만들기 위해 발동된 17세기 식민지 권력까지, 랭의 탐구는 한계를 모르고 뻗어나간다. 눈여겨볼 대상은 '울타리'다. 공공의 자연이었던 장소에 누군가 울타리를 쳤고, 그 안은 정해진 규격과 입맛에 맞춰 수정되었다. 랭은 안과 밖을 감쪽같이 갈라놓는 호화로운 대정원의 울타리를 보며 트럼프의 장벽을 떠올린다. 지나친 비약일까? 아름다움과 통일성이라는 명목하에 크고 작은 '울타리 치기'는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

울타리가 만들어낸 특권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울타리 밖에도 꽃을 심는 것이다. 랭은 강제와 추방이 없는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그가 꿈꾸는 "모두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정원의 기쁨과 슬픔' 안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정원, 그리고 공유 공간의 미래가 있다.(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

이솔림<br>

불가능한 애도(박영진 외 7인 지음, 림보 프레스, 2025)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력이 차오르는 봄, 삶의 자리에서 죽음으로 떠밀어진 이들이 남긴 구멍을 어루만지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나. ‘불가능한 애도’는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란 섣부른 위로를 거부한다.

어느 날 돌연 폭 하고 뚫린 구멍은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 피부에 난 상처에 새살이 돋듯 채워지면 좋으련만, 마치 종이 한 가운데를 도려낸 것처럼 떠난 이들의 빈 자리는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는다. 그 구멍을 메우는 방법으로써 애도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구멍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을 그리는 마음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애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책은 저자들이 저마다 정신분석 이론과 자크 데리다, 모리스 블랑쇼의 말들, 그리고 영화감독 샹탈 아르케만의 작업을 구석구석 살피며 ‘가능한 애도’를 찾아 나선 기록이다.

홀연히 먼저 간 이들이 남기고 간 구멍을 매만지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불가능한 애도’를 권한다. 슬픔을 딛고 일어나려 애쓰지 않고, 그와 함께 살아갈 방법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마음 깊이 애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황예린/출판마케터·문화비평가·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