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국립극단 위상에 손색 없는 리얼리즘 대작 ‘만선’ 시즌3

- 천승세 작, 심재찬 연출 ‘만선’ 시즌3 - 배우들의 완숙한 연기와 스펙터클한 무대효과로 연극만의 아우라 극대화 - 심재찬의 새로운 해석에 '곰치' 역 김명수의 명연 · '구포댁' 정경순의 열연 돋보이는 새 버전

2025-03-07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천승세 작, 심재찬 연출의 ‘만선’ 시즌 3은 이전 공연과 달리 대사의 묘미를 살리고, 배우들의 연기로 드라마를 구축한 사실주의 연극의 백미(白眉)로 거듭났다. 

첫 공연에서는 가파른 무대에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배우들, 특히 주역인 곰치(김명수)와 구포댁(정경순)이 작아보였는데, 이번 시즌에서는 김명수 배우의 명연(名演)이 빛을 발했고, 정경순 배우의 열연이 객석을 압도했다. 두 아들을 바다에 묻고 셋째 도삼 마저 풍랑에 잃은 구포댁은 간난 아들을 배에 태워 뭍으로 보내고 실성한 모정의 한(恨)을 신들린 연기로 풀어냈다.

대도시 명동 한복판에서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부서지는 포말이 덮치는 실감 100%의 리얼리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만선’의 티켓 비용은 아깝지 않을 만큼 강렬한 특수효과는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였다. 필자처럼 객석 중간에서 서늘한 물안개를 접하는 아우라는 영화나 TV에서 접할 수 없는, 공연예술인 연극만의 실감(實感)이 아닐 수 없다.

2년 만에 ‘만선’을 다시 무대에 올린 심재찬 연출은 코로나 시기 시연까지 네 차례 이 작품을 파고들면서, 이번에 근래 보기 드문 특유의 사실적이면서 배우가 보이는 사실주의 연극의 완전체를 내보였다.

첫 장면부터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로 스토리를 응축해 가면서 극에 꼭 필요한 장면에서 두 차례 특수효과로 집중포화를 가해 극의 클라이맥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것이다.

특히 동일 배역을 거듭해온 배우들의 연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어느 곳 한 군데도 막힘이 없이 자신들의 캐릭터를 완전 소화해 낸 것이다. 12명의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오차 없이 소화해 냄으로써 관극하기가 편했다.

배우 각자의 연기가 무르익어 앙상블이 약화된 느낌을 준다던가, 사투리 때문에 대사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간혹 보였지만 이는 행복한 불만이 아닐 수 없다. 한 공연에서 모든 캐릭터의 연기가 정상 궤도에 올라 안정감을 주었다는 점, 암전 없이 장면을 전개하는 유려한 템포가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선주 역 김재건 배우는 원로다운 원숙한 연기로 인정사정없는 자본가의 캐릭터를 카랑카랑하게 해냈다.

어부 성삼 역의 김종칠 배우는 곰치의 절친으로 뱃사람 기질을 거친 듯 인정 있게 풀어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었다.

곰치의 딸 슬슬이를 넘보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 범쇠 역 박상종은 악역을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설정해 얄미울 정도로 집요한 연기를 펼쳤다.

어부 역 정나진은 이번에도 사건을 전하는 긴 대목의 대사를 감칠맛 나게 펼쳤고, 무당 역 조주경도 뱃사람들의 운명을 가르는 초반 장면을 신기 넘치게 풀어냈다.

젊은 배역들인 도삼 역 황규환, 슬슬이 역 강윤민지, 연철 역 성근창은 운명에 순종하기보다 신세대다운 패기로 희망을 펼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들의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해냈다.

마을 아낙 역 김경숙, 어부 역 문성복도 뱃사람들의 체취를 구성지게 연기했다.

곰취 역 김명수는 노력하는 배우임을 이번 무대에서 더욱 여실히 보여주었다. 캐릭터 분석으로 곰치의 의지와 감정선을 계산된 동작과 대사로 창출해낸 그의 연기는 리얼리즘 연극의 표상이 될만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바다를 떠나지 않겠다는 곰치와 달리 뭍으로 가고 싶은 구포댁 정경순은 만선은커녕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절망의 캐릭터를 온몸을 던져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번 ‘만선’은 구포댁 버전이라고 할 만큼 감정선을 잘 잡아냈고, 시종 무대를 장악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국립극단이 우리 어촌의 토속성이 강한 ‘만선’을 레퍼토리화 함으로써 리얼리즘 대작으로 정착시킨 것은 바람직한 기획이라고 본다. 국립 타이틀이 붙은 극장이 서울에도 여럿이 있는 만큼, 전통이 깃든 명동예술극장만큼은 한국의 고전을 심도 있게 형상화하여 세계와 겨루는 리얼리즘 걸작들이 공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범석의 ‘산불’, 노경식의 ‘달집’ 등 재조명하면 좋을 작품들은 많다고 본다.

심재찬 연출은 이 같은 우리 정서를 무대에 형상화한 사실주의 대작을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60년이나 된 작품을 지금 시대에 맞게 각색(윤미현)하고 최고의 스탭진(무대 이태섭, 조명 신호, 의상 최원, 음악 길철환 등)으로 완성도를 높여 중장년은 물론 젊은 관객들까지 공감하는 역작을 보여준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특히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살아내는 우리네 인생을 배우들이 실연할 수 있는 연극만의 아우라는 영원하리라는 것을 ‘만선’은 실증해 주었다. 공연은 3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