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365칼럼 | 노래하는 삼국유사] (24)통일신라 삼대 보배, 최초 세계인 김인문 이야기

[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놀이터 이야기]

2025-02-11     정진원 칼럼니스트
경주

(23)통일신라의 세 영웅, 삼대 김흠순·김반굴·김영윤 이야기 이어서

신라 삼대 보배 김유신, 김흠순 그리고 김인문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신라에 삼대 보배가 있다고 김춘추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은 일찍이 갈파하였다. 김유신, 김흠순, 김인문을 일컬어 나라의 보배라고 (公等三臣 國之寶也)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말하였다. 그 셋을 꼽은 주인공 형이자 문무왕 김법민이 인정한 동생 김인문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김인문이 두 보배 김유신과 김흠순 형제에게 어떻게 필적할 만한가. 그는 김유신과 흠순의 누이 문명왕후 문희의 아들이요 이들에게는 외조카이기도 하다. 왕자로 태어나 왕의 동생으로 왕의 숙부로 살다 간 김인문. 그와 관련된 몇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노래하는 삼국유사’도 대단원을 향하고 있다. 

신라의 세계인 김인문을 위한 노래 

신라를 통일한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 
통일을 확고히 한 문무왕의 동생으로 살았지 
그렇다면 평생 서열 2위 내가 머물 곳은 어디메냐 

세상은 세상의 중심 중국 당나라와 언저리 변방으로 이루어졌지 
마치 불교 우주 수미산이 세상 가운데 버티고 있는 모양이 중국이라면 
신라는 그 대륙의 끄트머리에서도 남쪽 섬 
남섬부주에 불과했지 
남섬부주에서도 밀려나면 끝장인 꼬랑지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네  

끄트머리에서 치고 올라와야만 하는 약세 신라 
목숨바쳐 남섬부주만이라도 차지하고자 
아버지와 형 김춘추와 김법민 
망국 가야 후손 외숙부 김유신과 김흠순 
죽기살기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였네 
그것도 세상의 중심 당나라의 힘을 빌고 빌어서 

나 김인문 
기꺼이 두 나라 사이의 볼모로 살았네 
당나라에서 목숨을 마쳤네 
아버지와 형, 외가의 절대절명 
통일신라냐 또다른 망국의 가야냐 
그들이상으로 목숨걸고 외교를 하며 살았네  

나 김인문
인(仁)을 추구하며 불교의 나라에서 두루 유불도를 공부하였네 
서예와 신라 음악을 사랑했지만 말타기와 활쏘기도 게을리 않았지 
문관의 심성을 타고 났으나 시대가 원하는 무관으로도 살았네 
외줄타기 약소국의 대당 외교에서도 한 치의 오차를 범한 적이 없었네

형 문무왕이 백제 고구려 지분 요구하는 당고종에게 밉보여 
할 수 없이 내가 신라왕의 직책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천부당만부당 신라왕으로 부임하다 없던 일로 만들었지  
'형 당에 사과하는 척 해' 
문무왕은 못 이기는체 사과를 하였네

내 인생 스물셋 
처음 당나라로 숙위 가서 
일곱차례 스무해남짓 살아내며 
나당연합의 브레인이자 볼모로 
이토록 수많은 곡예를 하였네 

당 고종의 왕비 무 측천도 사랑했던 나, 인문 
내가 죽자 고이 신라로 모셔 보내 
아버지 무열왕 옆에 묻혔네  

혹시 나를 모르는 후손들이여 
괜찮아 괜찮아 
나보다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도 있다 들었네 

이땅의 수많은 위대한 민초들도 모두 그러함을 
내 똑똑히 보고 듣고 있네 
작금의 대통령 계엄과 탄핵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나의 사랑하는 신라의 후손들이여 
아버지 춘추도 형 문무도 
실질적 통일의 주역 외삼촌 유신과 흠순도 
그대들을 보우하사 
길이 보전하리니

김인문 통일신라 진정한 세계인

김인문(金仁問, 629년 ~ 694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름조차 인문(仁問)이다. 유교 책을 많이 읽었고 장자·노자·불교의 책까지 섭렵한 유불도에 능통한 학자였다. 예서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한 데다 향악(鄕樂)까지 잘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 7세기는 정말 천재들의 집합 시기 같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7세기로 날아가 김유신과 김춘추, 문희, 보희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김법민, 김인문 그리고 원효와 의상, 자장과 만나 한바탕 어깨춤추는 축제를 벌이고 싶다. 물론 여기 나오는 계백과 선덕과 진덕, 미실까지 모두 만나고 싶다.

인문이 이토록 문무를 겸비한 데다가 23세부터 죽을 때까지 22년 동안 일곱 차례 당과 신라를 넘나들며 외교활동을 하다가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당시 당이 어떤 나라인가. 세상의 중심, 세상의 제일 큰 나라가 아니던가. 김인문은 신라 최초 세계인의 삶을 살았다.

어쩌면 나도 인문의 후손으로 20세기와 21세기를 살아가며 대한민국 세계인의 피를 잇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뿐인가. 한류라는 당나라를 능가하는 세계문화를 펼치고 있는 후손들이 얼마나 많은가. 

 폭넓은 유불도를 통달한 식견을 갖추고 당대 세계 최고의 나라인 당나라 문물을 접하고 산 김인문. 만년 2인자인 그에게 어쩌면 신라는 통일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작은 나라였을지 모른다. 그의 생애가 두 나라를 아우르는 훌륭한 장수와 외교의 역할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김춘추(金春秋)와 외삼촌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힘쓰는 것이 어쩌면 왕노릇하는 형 문무왕과 상생하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생애를 당나라에서 마치면서 양국 간 정치적 분규를 해결하고 중재에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김인문이 활약하던 7세기 삼국시대와 당나라 

인문이 태어난 7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안으로 진평왕이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권 안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밖으로는 신라의 팽창에 대항하여 백제·고구려가 결속하여 신라를 공격해 국가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김춘추와 김유신이 힘을 합하여 신흥세력을 이끌면서 선덕왕·진덕왕을 세워 기득권 귀족의 반발을 무마시켜 나갔다. 특히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에게 당한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 함락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김춘추는 백제 정벌을 위해 정치·외교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는 특사로 떠났으나 실패하고 다시 일본방문에서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적극적인 친 당정책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유신이 적극 가담한다. 

그 과정에서 당나라 외교는 사실 인문보다 먼저 춘추의 셋째 아들인 김문왕(金文王)이 따라가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머물렀다. 김문왕은 648년(진덕여왕 2)에 아버지 춘추와 당나라에서 군사원조의 약속을 얻어내고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춘추는 신라와 당나라의 원활한 관계와 군사적 협조 등 여러 가지 문제해결에 주역을 맡아 왕위까지 오르게 된다.

인문의 당나라 숙위와 신라 압독주 군주

경주

651년 23세에 인문은 김문왕과 교대하여 처음 당나라 숙위로 파견되어 조정에 머물면서 양국 간 현안문제에 있어 중개 임무를 맡는다. 당나라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라는 직함으로 5년간 머물면서 백제정복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협의하였다.

인문은 656년(무열왕 3)에 그에 대한 준비를 명목으로 신라에 한 번 귀국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따른 인사와 아울러 국내의 전략 점검을 위한 태종무열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숙위는 다시 춘추의 셋째 아들 김문왕으로 교대된다. 인문은 귀국과 동시에 압독주(押督州 경산)의 군주(軍主)가 되어 장산성(獐山城)의 축조를 감독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국내 정치활동이었다. 그의 역할은 백제정벌의 군사작전 및 진격로의 최종 점검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용산산성.

658년 인문은 다시 당나라로 떠났다. 가서 660년 백제정벌의 당나라 측 부사령관인 신구도행군 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서 당나라 사령관 소정방(蘇定方)을 도와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다.

백제의 지형을 알고 있다는 작전 수행상의 이점이 있어 당군의 선봉을 이끌고 덕물도(德勿島: 지금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기벌포(伎伐浦: 지금의 장항)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뒤 7월에 김유신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나당연합군과 백제와 고구려 정벌 활약상

백제를 정복한 후 소정방이 의자왕, 태자 융(隆) 및 고관 93인과 1만 2,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가자, 김인문도 사찬(沙飡) 유돈(儒敦)·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과 함께 숙위를 계속하였다.

다음은 고구려 정벌이었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귀국하여 고구려 정벌의 시기와 방법 등을 통고했고, 이어 7월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임시군을 편성하여 진주(眞珠)·흠돌(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되었다.

8월에 김유신의 진두지휘하에 고구려 정벌을 떠나 평양 근교까지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당군이 퇴각하고 신라군도 후퇴하였다. 이때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김유신과 더불어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전장(田庄)·노복을 받게 되었다.

662년 7월 네 번째 당나라로 들어가 고구려 정벌의 실패 요인을 검토하고 우선 시급한 백제 잔적의 토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664년에는 납치해 갔던 백제의 왕자 융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 귀족의 회유 및 포섭에 나선다. 또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된 융과 웅진에서 만나 천존(天存)·유인원(劉仁願)과 함께 화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의 고구려정벌을 보다 쉽게 하여, 그 해 7월 군관(軍官) 품일(品日)과 함께 일선(一善)과 한산(漢山)의 군대와 웅진성의 병마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꾀했을 때 그 첫 번째 전과로서 돌사성(突沙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65년에 숙위 하던 김문왕이 당나라에서 죽는다. 인문은 다섯 번째 당나라에 가서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을 따라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했으며 그때 우요위 대장군(右요衛大將軍)이 되었다. 666년에는 삼광(三光)·한림(漢林)과 숙위를 교체하고 귀국하여 이적(李勣)의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 측이 협조할 사항을 전달하였다.

668년 6월 당나라 고종의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닿은 유인궤(劉仁軌)와 삼광을 맞아들여 최종적인 고구려 정벌 작전을 수립하였다. 이때 흠순·천존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북진을 시작했으며, 김유신이 풍병(風病)으로 출정하지 못하자 신라군 사령관으로서 이적의 당군과 함께 9월에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적의 당군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 등 20여만 명과 함께 귀환할 때, 대아찬(大阿飡) 조주(助州)와 함께 다시 당나라에 갔다. 그때 문무왕에게서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받고, 계속 숙위로 당나라에 머물면서 양국 간 분쟁을 조정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목도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잔민을 앞세워 당군을 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배당운동(排唐運動)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양국 간의 대립은 671년의 설인귀(薛仁貴)의 항의문과 왕의 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문무왕 대신 신라 왕이 될 뻔한 김인문

674년 신라가 고구려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고토를 잠식하면서 노골적인 대당항쟁을 계속하자 당나라는 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웠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관으로 하여 쳐들어 왔다. 이에 왕이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자 김인문도 도중에서 돌아가 임해군(臨海君)으로 봉해졌다.

그 뒤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양국 간의 정치적 분쟁도 거의 사라져 대우를 받았다. 679년 진군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에 전임되고,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군 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을 제수받았다.

694년(효소왕 3)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유해를 사례시 대의서령(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의 호송으로 본국으로 옮겼다.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다음 해서악(西岳)에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옆에  있다.

세상의 많은 김인문들에게

시대를 풍미하였으나 삼국을 통일한 아버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큰형 문무왕 김법민에게 가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된 김인문. 지난 글 김흠순과 김인문에 대하여 삼국사기 기록을 자세히 쓴 이유이다. 사실 춘추의 셋째 아들 김문왕도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춘추와 세 아들의 살신성인으로 이룩한 통일 신라이다.

어쩌면 세상에는 김인문. 김문왕 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 세상이 삐뚤빼뚤 굴러가면서도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대의를 바라보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세속의 수행자들이 어쩌면 출가수행자보다 한 수 위일지 모른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존재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만 크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세상은 어찌 보면 불공평하다. 천재들은 대부분 시대보다 너무나 일찍 태어났으며 이름을 날린 위인들은 주로 위기에 태어나 한 인생 불태운다. 무사태평한 시절에 인재들이 누가 있나 떠올려보라. 

그러니 소소한 소시민으로 살아온 나는 행운일지 모른다. 내가 김인문으로 살았으면 만족했을까. 춘추로 살았으면 삼국을 통일했다고 좋아했을까. 길이 역사에 남을 인생을 계획하며 살았을까. 각자의 시대에 태어나서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고 대의를 위하여 살다 보니 누구는 무열왕이 되고 누구는 김인문이 된 것이다. 그것이 역사가 되어 21세기 대한민국이 되고 우리는 또 다른 춘추와 인문의 역할을 다하며 이 글을 읽을 후대의 좀 더 나은 미래를 지금 써 내려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