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평 - 새로운 서평] 비바레리뇽 고원·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外

- [비평연대] 이솔림·배희주·김상화·황예린·백희성의 500자 서평

2025-02-04     김리선 기자

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김하현 옮김, 생각의힘)

“누구나 삶의 어느 시점에, 자기 코앞에 총을 겨눈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다. ‘유대인은 어디 있나?’ (...)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가 전진하고 총이 겨눠질 때 우리가 어떤 사람일지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_ 책 속에서

수년간 전쟁과 폭력을 연구하다 어느 순간 마음이 “툭 부러져”버린 한 인류학자가 고원으로 향한다. 프랑스 산간벽지에 있는 작은 마을. 혹독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곳에, 칠흑 같은 새벽에도 쉽게 대문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열린 문으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몸을 피했고, 이어 가톨릭 신부, 난민이 된 아이들, 갈 곳 없는 부랑자들이 모여들었다. 매번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폭력 속 비바레리뇽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에 처한 이들을 도왔다. 그 묵묵한 움직임은 수백 년간 이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음이 부러진 인류학자는 폭력에 맞설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 나섰지만, 그곳의 이야기는 평범했다. 코앞을 스쳐 간 총 비린내를 애써 잊으며 자신의 집과 옷과 음식을 내어준 이들은 평범한 농부, 교사, 상인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낯선 풍경에 얼굴 한가득 눈물을 흘리다가도 금세 어울려 놀았고, 그 베풂과 보호 속에 거대하고 안전한 공동체가 세워졌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비바레리뇽이라는 그 커다란 원 안에 한 발, 두 발 걸어 들어간다. 겨눠진 총과 닫힌 문 앞에서 수백 년간 이어진 고민의 흔적을 뒤따라 밟으며 저자는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되뇐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어.” 새해를 맞이하며 한껏 부푼 마음이 있다면 한구석을 살짝 떼어내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데 쓰면 어떨까. 그 여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 그로 인해 올 한 해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이솔림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조선잡사 (강문종 외 3인 지음, 정명환 옮김, 민음사)

농부나 관리처럼 익숙한 직업 말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조선잡사’는 시장, 뒷골목, 술집, 때로는 국경에서 바닷속까지 넘나들며 치열하게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의 시작은 ‘일하는 여성들’이다. 조선판 웨딩플래너가 있었다면 믿을까? 수모는 신부의 머리 손질부터 화장, 의상은 물론 결혼식에서 주례 역할까지 맡았다.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냐면, 시골에서 혼례를 치를 때 수모를 불러오기 위해 뇌물을 주고 노비와 말을 보내 태워 올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집안일만 했던 건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선입견을 바로잡기 위해 가장 먼저 여성들의 직업을 살펴본다.

대리 시험 전문가였던 거벽, 출판기획자였던 세책점주, 매를 대신 맞는 매품팔이... 어떤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어떤 일은 지금의 직업과 비슷한 형태로 남아있다. 목차만 봐도 흥미로운 67가지 직업의 이야기.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읽는 내내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조선 시대의 ‘일’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보길 바란다. (배희주 / 출판마케터·비평연대)

프로필_배희주

■ 설자은, 불꽃을 쫓다 (정세랑 지음, 문학동네)

680년대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정세랑식 본격 역사 미스터리! ‘설자은’ 시리즈 2권이 나왔다. 1권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서 주인공 설자은은 가정사로 인해 ‘설미은’이라는 본래 이름 대신, 죽은 오빠 ‘설자은’으로 남장해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그 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 설자은. 하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돌아오는 배에서부터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족족 해결해, 결국 왕에게까지 불려간다. 그렇게 ‘설대사’라는 직함과 함께, 자은은 ‘왕의 사람’임을 뜻하는 칼을 하사받는다. 이것이 1권의 이야기.

이번 2권 '설자은, 불꽃을 쫓다'는 칼을 하사받고 왕이 직접 부리는 사람이 된 설자은이 금성의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수사하며 “베어야 할 자들”을 끝내 제 칼로 베어 가는 이야기다. 피비린내 속에서 때로는 마음까지 다쳐 가며 한층 단단한 탐정으로 성장하는 설자은을 만날 수 있다.

첫 단편 '화마의 고삐'에서는 삼한통일 이후 나라를 잃고 통일신라에 흡수되었던 백제 잔민과 북방의 말갈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당시 신라인이었을까, 신라의 이방인들이었을까? 전쟁 이후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신라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씁쓸한 단편이다. 두 번째 이야기 '탑돌이의 밤’에서는 비로소 설자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여파로 자신의 뒤를 캐려는 이들이 나타난 가운데, 자은은 뜻밖의 일로 남장여자라는 제 신분를 밝혀도 안전한 새로운 벗을 얻는다. 마지막 단편 ‘용왕의 아들들'에서는 ‘탐정 설자은’과 ‘인간 설자은’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내면에서 맞붙는 내용이 그려진다. 그간 금성에서 겪은 험한 일들을 자양분 삼아 “날뛰는 것들을 삼키고도 태연함을 내보이는 법”을 배워 한층 담대해진 설자은을 만날 수 있다.

‘추리소설’이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발명된 이래, 한국에서는 김내성과 김성종을 이어 대중을 추리로 사로잡기 위한 미스터리문학 작가들의 고투가 있어 왔다. 그럼에도 한국 추리 문단은 이제껏 이미 이 장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일본과 영미권 추리소설의 담(?)을 넘지 못했다. 그간 한국의 추리문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다. 그 가운데 2023년 탄생한 것이 정세랑의 ‘설자은’ 시리즈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2030 여성 선호 작가 1위이자 밀레니엄 대표 작가라는 단단한 수식을 다져 온 정세랑이 역사 추리소설을 본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는 1권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이 시리즈가 “열 권을 넘어서면 좋겠”다고 썼다. 이는 단연코 한국 추리문학계가 새로운 독자들을 유입할 기회가 아닌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한국 독자로서 ‘설자은’ 시리즈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

1권에 이어 이번 2권에서도 설자은과 그의 영원한 식객 ‘목인곤’의 콤비플레이가 신명 나게 펼쳐진다. 그 가운데 1권에서 조력자처럼 등장했던, 죽은 진짜 설자은의 옛 연인 ‘산아’가 이번 2권에서 크게 존재감을 발휘한다. 새로이 등장한 말갈인 부하들 걸마지·걸마형·걸마달 삼형제의 활약도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재미 요소는 바로 ‘유머’. 정세랑식 유머다. 농담과 너스레가 리드미컬하게 오가는 대사들, 서로를 끈질기게 씹어 대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독자가 소설의 다음 장을 지치지 않고 넘기게 만든다. 재미난 한국의 추리소설을 찾는가? 천년왕국 통일신라에서 왁자하게 펼쳐지는 미스터리 대수사극, 설자은의 세계가 여기 있다! (김상화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도대체 어린이들은 왜 그러는 걸까?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가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고 딴짓을 하고, 별것도 아닌 걸로 떼를 쓰며 울고…. 언제나 효율성과 논리를 먼저 따지는 어른들에게 어린이들이란 참 엉뚱하고 이상한 존재다. 분명 어린이였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건만, 우리는 어린이를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어른들을 잊고 있던 ‘어린이라는 세계’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책은 어린이 편집자를 거쳐 어린이를 위한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저자가 직접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눈 아이들의 이야기로 꾸려졌다. 저자의 따스한 시선을 따라 어린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있자면, 마침내 어린이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깨닫게 된다. 책장을 넘기며 어린이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 하나둘 비눗방울 터지듯 사라진다. 대신 다정하고 신중하게 어른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대하려고 애쓰는 어린이들의 모습들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운다.

어린이들을 온전히 마주하며 마음이 말랑해진 틈을 타, 저자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진다. ‘도대체 어른인 우리들은 왜 그럴까?’ ‘우리는 어떻게 어린이를, 어른을, 세상을 대해야 할까?’ 그동안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을 보고 숨이 턱 막혔더라도 괜찮다. 힌트를 누가 쥐고 있는지, 책장을 덮은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우리 곁의 어린이를 반겨주자. 그리고 눈을 맞춰 보자. 아이들이 우리에겐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질문의 답을 기꺼이 들려줄 테다. (황예린 / 출판마케터·문화비평가·비평연대)


■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은행나무)

글 최혜진, 사진 신창용이 함께 만든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유럽의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 10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창의력, 호기심, 그리고 작업의 본질을 탐구한 책이다.

유럽의 그림책은 단지 어린이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읽으며 순수했던 동심을 떠올리고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상력을 다시금 깨우게 한다. 그림책은 결국 ‘모두의 책’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가 중 한 명은 에르베 튈레(Hervé Tullet)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독특하고도 신선하다. 그는 심심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 “창작의 시작은 혼자 고요함 속에 머물며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튈레의 이 말은 그의 작업 방식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의 그림책은 독특한 독서 체험을 제공한다. 대부분 텍스트 없이 그림만으로 구성되며, 독자가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2003년 발표된 튀르뤼튀튀(Turlututu) 시리즈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를 뛰어넘어 독자가 몸과 마음으로 책을 ‘즐기게’ 한다. 예컨대, “책을 흔들어 보세요.”, “괴물이 나타났어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 겁을 줘 보세요.” 같은 요청을 통해 독자는 상상 속에서 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아이들은 마치 자신이 마법의 일부가 된 듯한 환상을 경험하며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다.

튈레뿐만 아니라, 안 에르보,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벵자맹 쇼, 클로드 퐁티, 이치카와 사토미, 조엘 졸리베, 키티 크라우더, 올리비에 탈레크, 세르주 블로크와 같은 작가들의 인터뷰 또한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잊고 있던 동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책 속에서 작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믿음. 몽상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오래 바라보고, 숨겨진 의미를 찾는 시간이다. 다른 누군가가 되려 애쓰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행복하라.”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 책이 단순히 그림책의 매력을 전하는 것을 넘어, 육아와 삶의 방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동심의 세계를 통해 아이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단지 책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은 것이 아니다. 인터뷰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림책을 읽은 듯한 감동이 전해지고, 자연스레 작가들의 작품들을 손에 넣고 싶어진다. 그림책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거가 되어준다. (백희성 / 킵(KEAB)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작가)